지금부터 꼭 140년 전인 1879년, 중국 푸젠성 푸저우에서 샤무엘 쇼라는 영국인과 일본 여성이 결혼했다. 푸저우는 청나라가 영국에 개방한 첫 개항지였고, 신랑은 선박회사에서 일하는 선원이었다. 몰락한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신부는 무역상인 오빠 손에 이끌려 이곳에 정착했다. 당시 중국 내 영국 교민사회에서 ‘미개한’ 동양 여성과 결혼하는 일은 터부시되었다. 쇼는 자신의 부인을 동양인과 용모가 비슷한 스페인 출신으로 속였고 외출도 삼가도록 엄히 단속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의 자녀들조차 “어머니가 일본인이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 소설 같은 이야기는 쇼의 외손자인 피터 스터스버그가 쓴 《중국에서 추방된 이방인들》이란 책에 적혀있다.
쇼의 가족사에서 눈여겨 볼 건 샤무엘의 장남인 조지 쇼(1880~1943)다. 중국 단둥에서 선박회사를 운영한 그는 백범 김구를 자신의 배에 태워 상하이로 피신시켰고, 회사 건물에 임시정부 교통국을 두었으며 군자금 마련과 무기 운송에도 적극 나섰다. 이런 활동으로 1920년 그가 일경에 체포되자 영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한데 희한한 일은 조지 쇼와 그의 아들 역시 일본 여성과 결혼한 사실이다. 쇼 가문은 3대에 걸쳐 일본인 부인을 맞이한 셈이다. 추측컨대 백인 우월주의가 판을 치던 그 당시 영국 사회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남녀 간 사랑까지 좌지우지한 제국주의의 부당함, 국제결혼의 '유린된' 역사
같은 시기 일본에서도 조지 쇼 집안과 비슷한 사연이 있었다. 영국인 어네스트 사토우(1843~1929)는 일본과 중국에서만 30년을 근무한 직업 외교관으로 조선을 여행하며 도공과 인쇄술 관련 논문을 썼고, 지명을 정리한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다케다 카네라는 일본 여성과 가정을 꾸려 2남 1녀를 두었다. 그럼에도 외교관이란 신분과 사회적 통념상 정식 결혼 절차를 밟을 수 없었고 혼인신고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부부가 될 수 없는 ‘동거인’으로 선이 그어졌던 것이다.
2014년 9월 그의 손녀는 주간 아사히 인터뷰에서 “사토우는 일본을 떠난 뒤 아내에게 500여 통의 편지를 보내 가족에 대한 사랑을 전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남겨진 혼혈 자식들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훗날 세계적인 식물학자가 된 아들 다케다 히사요시는 영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서구적 외모를 지닌 그는 카메라를 들고 식물 채집을 하다가 ‘서양 스파이’로 몰려 여러 차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렇듯 남녀의 사랑에 인종적 차별을 덧씌운 서구 제국의 횡포는 한 가족의 운명을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의 삶’ 속으로 내몰고 말았다.
그런데 그 무렵 메이지 일본은 서구 문물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던 시기여서 도리어 서양인과 결혼하려는 풍조가 유행했다. 지식인들은 “백인종과 결합해 일본 인종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반면 조선의 사정은 달랐다. 쇄국정책으로 나라 문을 걸어 잠근 터라 외국인과 접촉하기가 쉽지 않았다. 개항기에 들어서도 일본인 거주지에 조선 여성의 출입이 제한되었고, 대한제국 시기 또한 외국인을 ‘위험한 타인’으로 대하는 정서가 강했다. 1909년 1월 대한매일신보는 “내·외국인 간의 혼인을 금지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국제결혼을 단일민족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애국심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지적했던 것이다.
한일병탄 이후에는 일제의 융합책으로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일본 귀족과 강제로 결혼하거나 친일파나 재일 유학생 가운데 일본 여성과 혼인한 사례가 더러 있었지만 극히 일부에 그쳤다. 그러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인과 일본인의 ‘내선결혼(內鮮結婚)’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일본의 다카사키 쇼지 교수가 쓴 《식민지조선의 일본인들》 책에 따르면, 조선에서만 1926년 50~60건이던 내선결혼 수가 1939년에는 무려 2405건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사실혼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내선결혼이 급증하게 된 데는 일제가 “조선과 일본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를 내건 탓이 컸다. 내선일체는 식민지인의 저항 의지를 꺾고 황국신민으로 교화시키려는 민족말살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먼저 ‘내선인의 통혼 장려책’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언론을 통해 내선결혼 슬로건을 홍보하고, 총독이 직접 모범적인 내선 부부를 표창하거나 내선결혼식에 경찰서장이 참석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1937년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일제의 이런 선전술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결국 내선결혼은 식민지인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일제의 ‘강요된 결혼’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남녀의 사랑을 강제한 제국의 횡포는 검은 대륙으로도 이어졌다. 아프리카 남부의 보츠와나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곳 부족장의 아들 세레체 카마(1921~80)는 런던 유학 시절인 1948년 영국인 루스 윌리엄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군인 출신인 루스의 아버지는 “내 딸이 흑인과 피를 섞을 순 없다”며 강력 반대했고, 부족민들도 “백인 여성을 왕비로 절대 인정할 수 없다”면서 거세게 반발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급기야 외교 문제로까지 번졌다. 인종차별 정책을 펴던 이웃 나라 남아공이 영국 정부에 강한 압력을 넣었고, 결국 카마는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다. 2차 대전 후 전쟁 부채에 시달리던 영국은 남아공의 금과 다이아몬드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결혼과 추방 과정을 겪으면서 카마는 조국의 독립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정당을 만들어 “제국주의 왕관을 버리고 민주공화국을 만들겠다”는 공약으로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고, 마침내 1966년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카마는 초대 대통령에 올랐고 루스는 아프리카 최초의 ‘백인 영부인’이 되었다. 인구 200만명에 불과한 최빈국의 독립과 건국을 이끈 카마 부부는 이후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보츠와나의 경제 기적’을 일구었다. 이 나라가 현재 1인당 국민소득 1만6000달러의 아프리카 최부국이 된 데는 다이아몬드 광맥이 발견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카마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 컸다. 이들의 영화 같은 이야기는 실제 영화로도 만들어져 2018년 《오직 사랑뿐》이란 제목으로 국내 상영되기도 했다.
경제력 우열로 옮아간 국제결혼 변천사
비록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카마 부부의 굴곡진 삶은 개인의 사랑을 국가 간 문제로 치부한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의 기형적인 만남이 빚어낸 모순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면서 국제결혼은 정치보다 국가 경제력에 좌우되는 변화를 겪어왔다. 한국만 해도 1990년대 이후 중국·베트남·필리핀 등 경제적 약소국의 ‘어린 신부’들이 대거 몰려왔다. 하지만 이들은 심각한 폭력·편견·갈등에 노출되었다. 단순한 문화적 차이가 아닌 사회적 차별에 시달렸던 것이다.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국가·인종·차별이란 과거의 담론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때마침 지난 10월9일부터 ‘국제결혼여성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외국인과 결혼해 해외에 살고 있는 한인 여성들이 “이주결혼 여성들의 차별과 편견을 없애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이주 여성과 그 가족들이 겪는 갈등을 치유하고 문화적 동질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미 우리 사회는 단일민족의 신화가 무너지고 다문화 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다. 더 이상 개인의 결혼을 피부색, 경제적 우열, 문화적 이질성이란 잣대로 차별해선 안 될 일이다. 100여 년 전 제국주의가 짓누른 ‘국경 넘은 사랑’의 아픈 역사를 이 땅에서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