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우수리스크 이상설 유허비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충북 진천 출신이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을사늑약’ 이후 구국활동이 제약을 받자 중국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1906년 8월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용정에서 활동하던 이상설은 광무황제의 명을 받고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가하였다.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도 함께 특사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1907년 6월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여 한국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에 나섰다. 일제의 방해로 희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주권회복의 당위성을 열강에게 호소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연해주를 독립운동기지의 최적지로 판단하고 유학자인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중·러 접경지대에 있는 봉밀산(峰密山)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의 강제병탄을 무효로 선언하고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자 성명회(聲明會)에 참여하였다. 이 일로 그는 러시아 당국에 의해 니콜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로 추방되었으며, 이후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했다.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勸業會)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권업회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간섭과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는 중국 상해로 활동지를 옮겨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결성에 참여하였다.
1916년 초 건강이 악화되어 하바로프스크(Khabarovsk)에서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기후가 비교적 따뜻한 우수리스크(Ussuriysk)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러나 결국 1917년 4월 1일 47세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는 임종 전에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자신의 몸과 유품원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하였다. 2001년 10월 18일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이상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라즈돌나야(Razdolnaya)강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201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