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담양군 고광순 생가 터

1958년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이 산화한 연곡사 옆 서부도 근처 동백나무 숲 아래에는 선생을 기리는 순절비(殉節碑)가 세워졌다. 불탄 그의 생가 터에는 1969년에 포의사(褒義祠)가 세워졌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친필 현판을 내려 보내 포의사에 걸었다. 그리고 포의사 앞에 건립한 사적비(事蹟碑)에는 고광순이 평소 좌우명처럼 삼았던 말을 노산 이은상이 가사체로 만들어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다.
의를 보고 몸을 버림은 종기에 침놓은 것 같고(見義捨身如大腫一針) 이익 따라 몸을 달림은 도둑과 같다(見利殉身卽穿踰一轍) 하셨네. 녹치(鹿峙) 연곡(鷰谷) 님의 발자취 어느 적에 사라지리까? 그 뜻 그 이름 이 겨레 하냥 만고에 전하리다.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의 호는 녹천(鹿川), 자는 서백(瑞伯), 광순(光珣)은 이명이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의병장의 12세손이다. 명성왕후시해사건과 단발령, 아관파천을 계기로 기우만이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합류하였다. 하지만 고종의 선유를 받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창평에서 의병을 모집,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1906년 12월 대장기를 앞세워 의병항쟁을 준비하던 중 고종이 은밀히 조서를 보내 의병들을 독려하자, 남원으로 진격하여 양한규(梁漢奎)와 합동작전 을 시도하였다.
1907년 8월 동복(同腹)에서 승전하고, 지리산 연곡사로 들어가 본영을 세우고 영호남에 격문을 발송하니 각 처에서 군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1907년 9월 11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