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이 아나톨리(강제이주)
고가이 아나톨리(남, 1936년생) 우즈베키스탄 강제이주자
연해주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비교적 이주 준비를 잘했던 부모 덕에 무사히 우즈베키스탄에 무사히 정착하였으며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 수의사로 살아왔다. 지난 2014년 9월 재외동포재단의 러시아 및 CIS 지역 동포 초청사업으로 모국을 방문했다가 본 재단과 인터뷰를 하였다.
▶관련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7211930
<녹취록>
00 : 00
질 :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답 : 1936년 8월에 태어났습니다. 1937년에는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죠.
01 : 19
질 : 강제 이주 당시의 상황은 어땠는지 기억하시나요?
답 : 당시의 기억은 남은 게 없습니다만, 부모님께 들은 바로는 강제 이주를 위한 시간이 1달만 주어졌습니다. 1달 안에 모든 걸 준비해야 했죠. 짐을 싸서 열차에 싣고 중앙아시아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02 : 22
질 : 어디에서 이주하게 되신 건가요?
답 : 연해주 볼킨스키의 구역의 산다가오 마을에서 강제이주를 당했습니다. 거기에서 태어났어요.
02 : 51
질 : 이주 당시,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답 : 아주 급한 상황에서 이주를 준비했습니다. 중앙아시아까지 가는 데는 한 달이 걸리기 때문에 음식도 준비했어요.
03 : 31
질 : 거기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답 :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한 달 정도 걸렸습니다. 일반 기차가 아닌 운송열차로 강제이주를 했으니까요. 가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04 : 12
질 : 이주 당시의 아나톨리 씨 가족은?
답 : 우리 식구는 6명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내 위로는 형님이 하나, 누이가 둘이었죠. 그래서 우리 식구가 들어왔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누이들은 모두 죽고 형과 저, 우리 두 형제가 살아남았습니다. 이주 당시 사람들이 짐을 싣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도 하지 못했습니다.
05 : 37
질 :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땠나요?
답 :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들은 식량을 많이 가져 오지 못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나왔지만요. 물고기를 항아리에 담아 먹으면서 이주했어요.
06 : 20
질 : 선생님은 잘 준비하신 것 같아요?
답 : 부모님이 준비를 잘 하셨습니다. 식량이 조금 있었기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먹었습니다. 물고기를 항아리에 넣어서. 대부분은 물고기를 항아리에 넣었거든요. 밀가루도 가지고 들어왔는데, 부모님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07 : 19
질 : 이주하는 동안 (기차 안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답 :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었어요. 열차를 세우라고 하면 그 쉬는 시간에 죽은 사람을 파묻고 계속해서 이동을 했죠.
08 : 05
질 :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후 어떻게 정착하셨나요?
답 : 여럿이 모여서 호수로 들어왔습니다. 포로를 조직하고.. 그렇게 우즈베키스탄에서 살았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많은 이들이 이주해 왔는데 한꺼번에 온 사람들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다른 데서 (따로) 온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어서 고생을 엄청 했어요. 집도 없어서 천막집에서 살았을 정도로요.
09 : 31
질 : 정착한 이후에는 어떤 생활을 하셨나요?
답 : 학교를 다녔어요.
09 : 46
질 : 어떤 학교를 다니셨나요?
답 : 러시아 학교를 다녔어요. 러시아 어로 교육을 받았고요. 선생님들은 고려 사람이었습니다. 연해주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교육을 받은 이들이 학교에서 선생이 되었죠.
10 : 41
질 : 학교를 지은 건가요?
답 : 우리 때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조그마한 학교를 지었어요. 3학년은 한 반에서 2학년, 4학년은 다른 반에서 공부했는데, 4학년까지만 반이 있었어요. 5학년은 다른 지역에 가야 했죠. 3, 4km 정도 떨어진 거리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11 : 54
질 : 원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학교인가요?
답 : 물론 현지에 있는 학교도 있었지만 그건 일부분이고 주로 고려인들이 학교를 지었어요. 5학년이 다닌 학교도 고려인이 지은 학교입니다.
12 : 46
질 : 또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면?
답 : 살던 곳에 있던 학교는 4학년까지 다닐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교육시키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센터(중심부)로 나가기로 결심을 했고 우리 식구는 토이티바로 가려고 했죠. 이후에는 러시아 대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 발령을 받아 3년을 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서는 부모님이 계신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계속 일을 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15 : 27
질 :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주실 수 있나요?
답 : 소 우유도 짜고 돼지도 키웠습니다. 사료가 많이 없어서 한 마리만 키웠고, 닭도 키웠어요.
16 : 25
질 :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 : 아버지는 여러 가지 일을 하셨어요. 경비 일도 하시고 말 돌보는 일도 하셨고... 벼농사도 지으셔서 어릴 적에 풀도 뽑았어요. 자랐을 때는 일도 도와 드렸는데, 여름방학 때는 목화밭에서 목화를 따기도 했죠. 집의 모든 일을 했는데, 한 사람은 앞에서 끌고 한 사람은 뒤에서 도와 주며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목화 고랑을 갈았습니다. 요즘에는 기계로 하는데, 그때는 그렇게 했어요.
20 : 05
질 : 혹시 더 기억나는 일 있으세요?
답 : 그 이후로는 제가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일을 하고 지냈어요.
20 : 26
질 : 당시 선생님의 또래들이 많이 있었나요?
답 : 포로수용소 자체는 크지 않았습니다. 같은 또래가 10명 정도 있었고, 같은 일을 했어요.
21 : 26
질 :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 일을 했나요?
답 : 우즈베키스탄 민족, 고려민족이 섞여서 살았어요. 그렇지만 대부분 운영이나 관리는 고려인들이 했어요. 운전기사도 고려인들이 했어요. 대부분 고려인들이 했어요.
22 : 44
질 : 고국을 방문한 소감이 어떠세요?
답 : 우선 고맙고 재외동포재단에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어요. 전부터 한국에 오려는 생각이 있었어요. 늘 와 보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이죠.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기회가 주어졌네요. 기쁘고 마음이 놓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많은 것들이) 기계화가 되어 있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도 봤습니다. 경치도 좋았어요. 기내에서 봤을 때 섬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토지가 활용되는 모습들을 모두 봤어요.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촬영 : 2014. 10, 코리아나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