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이윤철

이윤철 (1925년 1월 29일, 충북 청주 출신, 광복군, 건국훈장 애족장)

중국 광서성(廣西省) 유주(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9월에 임정의 인재 양성 계획에 따라 중국공군통신학교 제5기에 입교하였으며, 1945년 5월에 졸업함과 동시에 사천성(四川省) 신진(新津) b29기지에 배속되어 전선 출격 작전 지원 업무에 종사하였다.

▶공훈록: http://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5992&ipp=10000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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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해방 이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답: 한국임시정부 청년단에 있었어요. 그것이 사실 국민당의 김구 선생님의 영도하시는 한국국민당의 청년단에 있었습니다. 정부 지령에 따라 적 후방에 가서 직간접적으로 파괴적 혁명운동, 파괴운동. 선전한다든가 그런 일들을 많이 했었어요. 거기에서는 우린 (어릴 때라) 조그마니까 절대 하지 말라고. 일단 거기 희생된 분들이 있어요. 희생되고 또 다른 분들이 와서 또 가고, 이런 일이 있었어요. 가는 곳은 상해, 항주 또는 거기 경유해서 천진, 북경을 통해서. 우리나라, 우리 애국지사들하고 인포메이션(information) 서로 받고 지령 받고 그런 것도 했죠. 거기 있는 사람들도 가이드해서 일률적으로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 임시정부 산하에 국민당, 한국국민당 청년단이 속했었고, 김구 선생님은 너희들 젊은 사람들이 글공부도 안하고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아무 소리도 못하고 이거 뭐 너희들 차라리 그러려면 저기로 가라 김약산 있는 그 의용군. 의용군으로 가서 일하다가 좀 배워오든지. 우리는 일본하고 싸워서 우리나라를 독립시키는 것이 주목적이지, 무슨 정치 이런 거 없지 않느냐. 거기로 가라. 내가 나이 들어서 그래도(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누가 들어가 있었냐면 노태준... 지금 기억이... 꽤 인물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일부분은 상해, 또 이런 데, 익숙한 데 가서 적지 인포메이션을 해 나가고 활동하는 그런 공작을 했었고. 또 우린 광서 유주로 갔는데, 광서에 중국 제4군구 사령장관 사령부 거기에 있었어요. 거기 누가 있었냐면 백숭희, 이종인 이런 군부들이 거기 있어요. 그러나 그 두 분 전부 다 양광에 속해 있어요. 뭐냐면 광동, 광서. 양광에서 예속하는 군대, 광서군대 이런 거죠. 그래서 거기 모든 영토방어든지 대외전투 이건 두 사람이 다 결정해서 장개석한테 저 사인 받아서 시행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군 제4전구가 말이에요. 주로 광서구하고 광동군이고 그랬는데, 거기 정훈처가 있었어요. 정훈처가 우리나라의 정훈처랑 마찬가지죠. 거기서 주로 심리적인 대적활동을 했는데, 중국도 자기네들의 대일전투에 있어 상당한 정치 활동을 필요했기 때문에 일반 민중으로 하여금 납득시키도록 선전하는 거죠. 구내 선전요. 우리나라 청년단 안에 이런 정훈처가 있었어요. 거기서 같이 일하기로 크게 선을 꾸몄죠. 왜냐면 제가 어리긴 했지만 광동에 있는 연극단에 있을 때 대민족 선전할 때 거기에 제가 참석했어요. 참석해서 광동말로 하고, 광동, 광서 정부에서 파견한 우리에게 협조해 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을 통해 한국청년단하고 제가 했던 삼팔가영대 노래만 부르고 선전하는 거 대민 선전할 때 이 사람들이 먼저 나가서 무용도 하고 항전노래도 부르고.
 
12:13
질: 중국에서 군인 생활을 하면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
답: 근데 군대에 입대하는 게 저뿐만 아니죠. 제 손위의 처남, 임시정부의 군부에 속해 있는 사람이죠. 중국 육군군관학교 17기로. 여기 가끔 나오는, 부회장으로 있는 제일 큰 형(이윤장)이 19기로. 저는 공군으로 들어갔어요. 공군으로 들어갔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우리 정부에서 추천해서 가서 했는데 그때 한참 왜놈들이 벌써 귀주 근처까지 와 있어요. 내가 이건 못한다, 그때 장개석이 뭐라 하냐면 미국에서부터 (수입한) 고장난 거(무기) 수리한 거, 우리 중국에선 소위 modernized weapon이라고 그러거든요. 개량, 진보된 무기 이걸 갖다 하는데 영어를 압니까. 있는 사병들이 총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깐 이거 안 되겠다 해서 10만 청년군을 모집했어요, 그래서 제가 들어갔죠. 그러다 보니 제 선친께서 ‘너 그거 관두고 정 가려면 정식 군인, 중앙군 군관 학교에 거기 들어가서 해라.’ 그래서 제가 혼자 피신했습니다. 어디로 피신했냐면 중앙공군위원회의 사관학교로 피신했어요. 그런데 저는 다 합격했어요. 합격은 했는데, 그 다음날 신체검사에요. 신체검사하기 전에는 전 학교가 스승 할 것 없이 환송한다고 큰 파티했죠. 거기선 보통 나를 사람 같이 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하여튼 큰 대우 받았어요. 그런데 그 이튿날 별안간 눈이 오기 시작했어요. 거기 처음으로 눈이 와요. 그런데 그때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제가 학교 다녔을 때요, 군것질을 잘했어요. 여기 러닝셔츠 있죠. 여기에(가슴팍에) 헝겊 쪼가리를 달아 가지고 군것질거리를 갖다 넣어 놓고 공부하면서 껍질을 이렇게 해서(까서) 먹고 그랬거든요? 근데 그 껍질까지 다 호주머니에 있었어. 가서 엑스레이를 찍는데 폐병 3기라는 거야. 와, 이런 기가 막힌 날이었어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뭐냐고, 이거 뭐냐.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죽어도 학교 못 간다고 그렇게 환송받고 어딜 내가 무슨 낯짝으로 가느냐, 나는 못 하겠다 가서 떼를 썼죠. 내가 그 공군 파일럿 지원했는데 그걸 딴 데(라도) 없습니까? 있다고. 커뮤니케이션 엔지니어링(communication engineering)이니 이런 거 다 할 수 있다. 아, 그래요? 살았다. 그래서 내가 거기로 갔어요. 공군통신전자공육사관학교라 이렇게 돼 있어요. 내가 24기고, 김신 장군도 원래 임시정부 추천으로 학교에 들어갔거든요, 24기로 똑같이. 대신 나는 통신전자공군학교고 거기는 비행공군학교고. 근데 비행공군학교는 내가 가려 했다가 그 껍질 때문에 떨어졌어요. 할 수 없죠. 거기서 이제 전자통신전자를 거기서 배우기 시작해서 그게 내가 나중에 레이더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었습니다.   

18:10
질: 부친이신 독립운동가 이광 선생은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답: 어떤 걸 주로 했다기보다도 임시정부에 들어와서 김구 선생님을 보필해 드리는 거. 그런데, 가만히 회상하니까 우리 선친께서는 중국말을 잘하셨는지 와세다 대학도 졸업도 못하고 도망쳐 나오셨거든요? 그런데 중국 가서도 중국 대학도 졸업하고. 그래서 능히, 중국말을 상당히 유창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한국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대중에 발표하는 모든 사설이라든가 논문이라든가 이런 걸 다 선친께서 교정 봐 주시고 문구 다 고치시고 그런 역할을 하시고. 또 장사에 계셨을 때는 특히 김구 선생의 명으로 대정부 교섭은 제 선친께서 도맡아 하셨습니다. 도맡아 하신 일은 정치 관료들하고 같이 접촉하고 그랬었습니다.

질: 선생님 기억 속의 아버님은 어떤 분이세요?
답: 아주 엄하시고 재치가 좋으시고 문장도 잘하시고. 당시 무슨 중요한 때 중국에서 그런 뭐 문장이라든가 논문 다 대신해서 교정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장사에 있는 동안에는 대중국의 교육... 발행인(을 맡으셨다.) 그때 선전부장이 누구시냐면 엄대위 씨거든요. 그분도 모든 대외, 외교를 맡아하셨지만 대중국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는 저희 선친하고 의논하시고 다 그러셨어요.

22:02
질: 이광선생님이 하신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궁금합니다.
답: 주로 외무보다는 그때 그때 임시정부 지령을 받으셔 가지고 스스로 우리나라에서 자본, 자금을 우리 임시정부에다 전하는 사람들, 또 우리 여기(중국)에서 외지에서 일하기 위해 가는데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주로 안내하고 연락하는. 그리고 전 그건 모르죠. 선친께서 얘기를 안 하시니깐. 모든 문서가 꽤 남았어요. 이석호 선생. 이동녕인가. 그분이 제 선친을 많이 이끌어주셨어요. 제 선친이 이석호 선생님 말이라면 뭐든지 다 따르고 뭐든지 다 가서 여쭤 보고 그랬어요. 그래서 많이 존경하고 그랬었어요. 그래서 주로 뭐든지 문제 있으면 이 선생님께 가서 그때 돌아가실 적에는 한국 임시정부 주석이셨죠. 그렇게 돼 있었어요. 그 분을 잘 따르고.

질: 그 선생님이 잘 이끌어 주시고 선친께서도 잘 따르셨는데, 주로 독립운동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나요? 선생님께?
답: 우리 선친께서 아까 말씀 드린 중국 남경에 있는 남기가 거기 10호에 청년단이 거주했었거든요? 거기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모릅니다. 지금도 그걸 모르겠어요. 일부 문서는 여기 있는 것이... 2차 대전 끝난 다음에 제 선친께서 김구 선생님 명을 받아서 한국정부가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에 여기 대표단이라고 돼 있는 거기에서 박남파 (박찬익) 선생하고 그걸 같이 운영했었고. 우리 선친께는 특별히 화북하고 동북에 있는 그 교포들, 주로 그 사람들 보고 한국으로 돌아가든지 이북(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그런 일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문자는 많이 나중에도 전 알아볼 수도 없어요. 대외문서는 20편이 있어요. 아직도 있긴 있는데.

26:28
질: 말씀을 잘 안 해 주셨나 봐요?
답: 네, 왜냐면 저는 나중에 저는 저대로 학교는 중국 학교 다녔거든. 중국 학교 다닐 때에는 기숙사 들어가고 거기서 거주를 1년 내내 학교 내에서(했거든). 집하곤 뭐 안 해(집에선 있을 일이 없어). 정 필요하면 1년에 한 번이라든가, 큰 기념일 있을 때나 불러서 오는 그 정도죠.아버지로서 이광선생님이 계시고요, 독립운동가로서의 이광선생님이 계시잖아요. 아버지로서의 이광선생님하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이광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기억나는 일화가 있으세요?집에서는, 그나마 참, 아주 자상하시고. 애들 다 가정적으로 다 사랑하고. 틈만 있으면 특히 우리 누님, 형님이 숙제 같은 거 모르면 와서 저희 선친께서 다 풀이해 알려 주시고 다 그랬었어요. 가끔 강연(도 해 주셨죠), 많이 하진 못하시지만. 중국 친구 분들이 그래도 많이 있어서 한국에 대한 많은 이해, 그걸 획득하는 데 굉장한 역할을 하셨죠.

30:56
질: 그렇다면 이광 선생님께서는 해방 이후에 한국으로 들어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답: 먼저 한국, 그 중국에서 들어온 임시정부의 요원들, 그 가족들 집이 있어요. 무슨 집이 있는데 거기 들어가 계시고, 그러다 부름 받으셔서 당장 충북지사로 임명되셨어요. 먼저 이승만 박사, 부통령 이시영 선생님 이런 분을 원래부터 혁명동지이니깐 중국 화북에서 교포에 대한 업무 이런 거 하는 데 주력해 달라 하시고.... 생활이나 그런 건 괜찮으셨어요? 많이 검소하시다 들었는데, 생활하는 데 어렵거나 그런 건 없으셨나요?예, 아주... 우리 선친께서 체신부장관 임명되던 그 날 쌀궤가 비어 있었어요. (쌀이) 없었어요. 효자동 장관 관사에도 있을 데가 없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귀속 재산 집 하나 드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이죠. 원주민, 원래 거기 계신 분들이 ‘무슨 얘기냐, 우리가 여길 어떻게 주냐, 날 죽이려면 죽였지, 나는 나가지 못한다.’(그러신 데다) 그리고 그때는 또 그걸 갖다 동아일보는 이렇게 크게 써서 ‘현 정부 장관 아무개가 민간 가옥을 억지로 했다(뺏었다)’ 하니까 ‘아니 됐다, 싫다, 그만 둬라’해서 집을 (다시 돌려) 주셨어요. 그것도 못 얻었어요.  

34:23
질: 다른 가족분들도 독립운동을 많이 하셨죠?
답: 우리 집사람이, 성격의 탓인데 뭘 해도 했다고 안하려 해. 뭘 하고 나서도... 우리 장모님과 성품이 꼭 닮아서 남들은 일 다 하고 다 끝나면 사진 찍잖아요? 그때 우리 집사람의 할머니가 별호가 에고고할머니예요. 우리 집사람을 그냥 끌고 가요. 여자애들이 사진은 뭣 하러 찍어? 그거 나중에 어떻게 되려고 그래, 찍지 마라! 그러면서 으레 끌고 가곤 했어요. 그래서 우리 집사람은요, 그런 데 여러 군데 사진 나타난 데가 없어요.

질: 김구선생님이랑 저격 사건 때 사모님께서 간병하셨다는데 정확히 어떤 일들을 하셨어요?
답: 아니, 그건 저격사전은 장서화되어 있죠? 그걸 계기로 해서 김구 선생님은 나중에 상해의 의원에서 치료를 하다 중경으로 왔고 우린 광주에서 유주로 해서 사천으로 가되, 기강으로 갔어요, 기강. 어떤 일을 하셨는지?아까 말씀드린 한국청년단하고 중국 제4구 정훈처 일하는 데 다 참석했었고요. 우리가 사천에 갔거든요? 가서 우리는 토교(土橋)라는 데가 있어요. 그런데 김구 선생님은 그때 중경에 계셨어요. 그런데 이따금씩 토교에 와서... 토교 가기 전엔 장사에서도 주로 한정된 몇 분이 거기 가서 간호 일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 장모님 되신 분하고 우리 집사람, 엄항섭 선생 부인 이렇게 가끔 거기서 음식 조절하고 해 드려요. 중경 떠나서 우리 거기 갔을 때는 (김구 선생이) 각기가 생기셔서, 총이 심장을 맞췄으니 여러 가지 부작용 많이 생겼어요. 각기도 생기고. 이건 뭘 해야 되냐면 전기치료하고 물리치료해야 돼요. 그땐 지금 같은 물리치료는 없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 누님하고 우리 집사람하고 우리 장인께서 전기치료를 어떻게 하고 물리치료를 어떻게 하고 전기치료를 포함한 물리치료를 어떻게 하고 이걸 다 가르쳐 주셨어요. 그래서 그걸 우리 장모님하고, 또 다른 분 한 분이 있는데 이름 기억 안 나고, 우리 집사람하고 거의 (김구 선생님) 계시는 날이면 거의 그걸(물리치료를) 해 드리고 장사에서 떠나기 전에도 물리치료를 집사람하고 장모님하고 해 드렸어요. 일절 다른 사람 못 드나들게. 왜냐면 또 저격을 당할까 봐. 모험을 하면서 또 치료를 했고 그게 많이 작용이 됐었죠. 그게 특히 중경, 아니 토교에 있었을 때도 김구 선생님이 오셨다 하면 가서 전기치료 다 하고 그랬어요.  

40:05
질: (마지막으로)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후손들에게...
답: 우리나라의 근본 이런 걸 좀 아주 신나게 어린애들에게 주입시키는 데 그 좋은 방법으로 훤히 다 알아듣게, 자기가 앞으로 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의무가 나(에게)도 있다는 방향으로 내 할 일은 다 해야 한다는 이런 마음을 다 갖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