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이주호

이주호 (국어학자, 1921년생, 경북 영일 출신, 건국훈장 애국장)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1940년 교내 비밀결사 문예부에 가입하고, 결사조직 ‘다혁당’을 조직함으로써 독립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41년 7월 비밀결사가 일경에 피체되면서 1943년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공훈록: http://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6211&ipp=10000



<녹취록>

00:00
질: 선생님 인사 좀 부탁드릴게요
답: 귀 재단에서 말이에요. 독립운동 생존자 육성을 녹취해서 꾸밈없는 생생한 역사, (독립)운동사를 밝혀 두는 데 대해서 그 애국심에 감사하고 찬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는 그 역사를 역사로 다시 살아가기 마련이라고,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 새겨진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우리가 살아가는 길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귀 재단에서 하는 일은 아주 참뜻이 있고 바로 애국심과 집결된다고 생각해서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뜻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대략 독립운동을 어떻게 했다는 약사 또는 옥고를 치른 하나의 참상이랄까 이걸 이제부터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괜찮습니까. 그게 소개가 되겠습니까.)

01:40
질: 선생님께서 독립운동을 하게 된 제일 큰 계기는 어떤 것인가요?
답: 우리 가훈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훈은 정직하게 살고 바르게 살자는 건데, 그것이 또 학교 교육에서 어떻게 나타나냐면, 우리가 그 당시 학교에 다닐 때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주의(와 같은) 이런 애국심(에 대해 배웠고) 또 그 당시에 상록수라고 하는 소설이 나왔어요. 그럴 때 계몽운동, 문화운동, 교육운동을 통한 하나의 독립운동을 찾겠다는 것[소설의 내용]이 우리에게 굉장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구 사범학교를 다닐 때 김윤기 선생님이 조선어과를 담당하는 분이셨는데, 오히려 수업보다도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독립을 해야 된다는 걸 늘 교훈 삼아 계속 이야기를 암암리에 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아서 더 뜻을 굳혀서 우리나라를 찾아야겠다,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이런 뜻이 굳어진 것입니다.

03:05
질: 그 당시, 나라 사정과 선생님의 집안 사정은 어땠나요?
답: 나라 사정은 식민지 시대니까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사람에 대한 차별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는 게 한마디로 말하면 나라 사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고, 그 다음에 내 가정은 비교적 아주 산골에 있었지만 비교적 괜찮았어요. 지낼 만 했는데 다른 소작하는 사람들은 형편없이 그럴[지낼] 때 (저는) 보통학교를 나오고 대구 사범학교를 갈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학교 못 다녔습니다. 먹는 것도 거의 소작이지, 자작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어요. 그게 바로 참담한 우리나라의 형편이었습니다.

04:17
질: 국어학자로 많이 알려지셨는데, 해방 후에 주로 어떤 일들을 많이 하셨었나요?
답: 우리나라가 제가 바라고 바랐던 독립을 했기 때문에,  완전 독립은 아니었지만 일단 우리나라 이름은 찾았으니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8월 15일 날, 그 일본 천황의 항복 뉴스를 듣고 말입니다. 낮 12시부터, 그때부터 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못 먹는 술을 먹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해방 후에 건국준비위원회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의 치안을 유지하고 건국을 준비하는 준비기가 짧게 있었습니다. 면민의 바통을 받아서 그 면에서 건국준비 위원장을 했어요. 일제시대 독립운동했다는 것을 농민들이 그야말로... 그런 걸 하고, 학교로 들어갔습니다. 교육자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학교를 들어가서, 짚신으로 신고요. 내 별명이 짚신 선생입니다. 그리고 흰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그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겁니다. 우리 문화를 상징하고. 그래서 학교 교육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문화 이것을 강의하고 다른 교과보다도 거기에 치중해서 커리큘럼도 생각 안하고 흥분에 못 이겨서 기쁨에 못 이겨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교육을) 했어요. 또 내가 글 소질이 없지만 연극까지도 꾸며서 독립운동 연극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고을에서는 나에 대해서 짚신 선생, 흰 두루마기 선생, 흰 무명 선생 이런 별명이 나올 정도로 그렇게 기쁨에 못 이겨 가르쳤습니다. 하다가 역시 이거[교육]는 더 정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대학에서 마치고 중,고등학교에 죽 있다가 나중에 대학교로 이렇게 진출했습니다.

07:19
질: 대구 사범 비밀 결사 문예부에 가입하게 된 동기와 주요 활동은?
답: 1939년이면 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 한참 아닙니까. 1939년 대구 사범학교 재학 중에 비밀 결사 문예부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었어요. 또 다혁당이라는 당을 비밀운동,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어서 동기들끼리 그래서 반딧불이라는 잡지, (지금은) 독립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만, 반딧불 또는 학생지 이런 기관지까지 발간했어요. 물론 그 안에는 독립운동 규합에 대한 하나하나의 동기, 규합 또는 하나의 계몽 또는 독립운동의 필승 이런 게 다 적혀져 있어요. 그래서 그 권두사를 필경은 내 손으로 했습니다. 필경은, 일제시대 항일운동, 학생운동 (말은) 하지만, 이 기관지를 두 개 내 놔서 하는 곳은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꼭 자랑 삼아야지, 반딧불이라는 것은 남아 있습니다. 그게 다시 조명되어 가지고 역사에 나와야 되는데 이렇게 못하고 있다는 것이 독립운동 역사가들을 공격하는 게 아닌가 싶은 그런 생각도 납니다. 그런 역사가들,  그래서 그걸 주로 재학 중에 (하는), 아까 말했지만 김형기 선생이라는 조선어학과 민족주의자 선생님께 영향을 받아서 우리말, 우리글을 연구하는 데 열중하고 그래서 독립운동의 횃불을 올린 겁니다. 1939년, 심지어 제가 삼학년 때는 만주 수학 여행길에 있었는데 만주 수학여행도 중지하고 (몸도 조금 안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은) (수학여행도) 이주일간 중지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야학당에서 우리 한글, 우리 마을 글 또는 우리문화 전달하는 데 하나의 독립운동의 필승을 기원한 기억도 납니다.

10:28
질: 다혁당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답: 다혁당은 말했다시피 기관지를 내고 동지규합이라든가 민족 참여를 철폐라든가 일본 사람에 대한 대항이라든 가 이런 걸 많이 했죠. 그렇다고 우리가 총칼 들고 가서 (운동을) 한 것은 아닌데, 문학운동을 통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정신을 강연하는 데 그런 기관지까지 내 가면서 이렇게 해 왔는 게 그렇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간디의 비폭력 저항주의, 그게 문화주의고 계몽주의거든요. 이런 하나의,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그런,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활동을 한 겁니다.

질: 선생님께서 어떤 경위로 체포가 되셨고 어떤 고문과 어떻게 옥중 생활을 하셨는지?
답: 저는 1941년 여름에 구속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한 것은 2~3년밖에 못되지만, 그게 1941년에 그래서 치안유지법 육해군 군법 또는 언론,출판법의 위반으로 우리가 구속을 당했습니다. 한 가지가 아닙니다. 죄목이 많습니다. 대전 형무소에서 감옥 생활을 했는데, 그 생활을 대략 이야기하면 2년 6개월에는 독방수감 제도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생체 실험을 통하는 하나의 고문으로 고통을 줬습니다. 옥중 생활이 어떠냐면 한 평 밖에 채 되지 않은 밤낮을 누워 가면 혼자서 이렇게 있다는 것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그 한 평밖에 되지 않은 데서 굶주림, 기아(처럼) 콩 깨묵 밥을 줬는데, 그 밥(을 주는 것)이 일종의 생체 실험입니다 세균을 통한 생체 실험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당시에 우리 동기가 35명이 검거가 되었는데 5명이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굶주렸고, 그 눈을 완전히 봤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에 그걸 보면 볼수록 우리나라를 위해 더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그런 강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그대들의 눈에 비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했어도 저는 (전향을)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저는 그렇게 못 했습니다 그 마음이 안 바뀐다, 전향을 안 하는 거다 그런 거를 못 했습니다. 고향의 부모들이 형무소 당국하고 교섭을 하고 해서 전향도 하고 했는데 저는 그것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2년 6개월 독방 예심에서 그런 고통을 받아가지고 2년 6개월 만에 실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리 되면 명색이 자급을 하게 됩니다. 자급을 하는데 배가 고파서 걸음도 못 걷고 그래서 옥에서 나오면 청소라도 하러 나오면 풀 뜯어먹고 말입니다.
(15:35) 그 영동 수형소에서 수형당한 탈북자 같은 사람들의 수형소였기 때문에 쥐를 잡아 먹는다든가 그런거랑 조금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사람이 제일로 견디기 어려운 게 굶주림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히려 굶주림보다는 추위도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대전형무소에 있었는데 독방에 마룻바닥에서 이불도 손바닥만한 이불을 덮고 자고 그랬기 때문에 손발이 다 얼어서 동상을 입고, 손발이 끊어질 그런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까지도 손발이 피가 안 통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문 굶주림, 모진 고문으로 인해서 폐사상태에 있으면서 뜻을 안 굽혔고 그래서 병보석도 못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과장하고 간수하고 만나서 독립의 타당성을 직접적으로 말은 못했으나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 우리나라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던 거기 때문에 뜻을 안 굽히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받은 거지요. 1945년 3월에 일단 석방이 되었습니다. 석방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조선사상범 보호감찰이라는 법령이 생겼습니다. 그 법에 그 올가미에 덮어 씌워서 군수 공장에 다시 감금되었습니다. 나는 그 뜻을 안 굽혔기 때문에 다시 또 형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옥에) 들어가면 2년 6개월마다 다시 갱신하고 갱신했는데, 군수공장에서 감금당해서 이틀에 한번씩 고등계 형사들이 와서 감시하고 조사하고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실상) 무기수입니다. 사실을 그래서 아까 무기수라고 말했는데, 그래서 해방 후에 어찌 됐냐면, 해방 후 8월 15일 이런 날이 없더라면... 8월 17일에 다 일차적으로 대학살을 계획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400만 대학살이랑 다를 게 없습니다. 난 무기수가 아니라 사형수(였던 것이)라 이 얘기입니다. 한 2~3일 아니면 난 사형 받지 않았겠나. 난 그래서 8월 15일이 제 2의 탄생일이라고 해서 우리 처가 또 8월 15일이 생일이기 때문에 같이 생일을 합쳐가지고 그 날을 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기수요, 나는 사형수다. 사람은 초지일관 그 뜻을 굽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0:33
질: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이유는?
답: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건 선생님 교육[학교 교육], 가정교육입니다. 또 문헌을 통한 교훈, 그런 글로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고, 원래 성격상 (그럴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은 초지일관 가져야 됩니다. 중간에 마음이 바뀌면 안 된다 이겁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현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오늘날 (당시의 그런) 마음이, 독립운동 정신이 없다면 독립운동을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았지만 내 성격 또한 그렇기[강직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늘 정직하게 살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짓말을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형무소에서 고문해도 사실대로 그대로 (말)했지, 빠져 나오려고 뭐 어떻게 했다 이런 소리를 안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나는 독립운동을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후에도 우리 글을 통해서 우리 말을 통해서 우리 문화를 통해서 오늘날 민족정신을 통해서 이런 정신을 이어가자는 겁니다. 한글학회가 뭐냐면, 일제시대 한글학회는, 그 조선어 학회라는 사건 유명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명예이사로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까지도 나는 독립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내 나름대로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광복회에서는, 제가 등기이사로 또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초지일관이라는 의지로 살아야지 (그렇지 않고) 중간에 마음을 바꾸고 그러면 기회주의자이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속 이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회에 윤리라든가, 윤리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이큐만 높아선 안 된다 이겁니다. 이큐가 높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큐라든가 이런 게 있어야지. 그렇기 때문에 교육에서도 이런[이큐를 높일 수 있는] 게 갖춰줘야, 인간성(을 기를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야만 그것이 바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끔 해 주는 거고, 그래서 (학생들은) 이런 걸 갖춰야 되지 않나 나는 그런 걸 교육계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뜻을 안 굽혔다는 게 꿋꿋한 게 있었겠죠.

24:14
질: 최근 들어서 일본이 말도 안되는 역사왜곡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 그거에 대해서는 한 예가 있는데, 내가 한번 택시를 타고 있는데 택시기사가 독도문제가 불거졌을 때 나한테 말하기를 왜놈들은 죽여야 됩니다, 총리를 죽여야 됩니다(라고 하더군요). 걔네들이 일제시대에 참혹하게 우리나라 사람을 죽였으면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것도 우리 땅을 또 빼앗으려는 근성이다, 그렇게 때문에 왜놈들은 죽여야 된다고 이렇게 말했어요. 그 사람들은 애국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그거는 적반하장에도 분수가 있는 거고 그렇게 많이 취했으면 미안하다는 생각도 해야 할 텐데 거꾸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을 얕잡아 본다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새로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 정치인들 저렇게 막 싸우고 하는 거 그런 건 보지도 않고 난 슬프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광복회도 중요하지만 광복을 찾았다 하지만 그 국치일 8월 29일 날 우리나라가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그에 대해 우리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온 국민에 합치고 이랬으면 친청이 있고 러시아 중국 세로 파도 갈리고 그래서 우리가 빼앗겼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오늘 이 정세를 봐서 특히 나는 8월 29일 국치일을 나는 상당히 부각시켜가지고 사람들은 반성이 있어야 됩니다. 반성을 하고 과거를.... 그런 의미에서 더구나 오늘 시국에서는 온 국민이 협력해가지고 난국을 이걸 배워나가야지 방송 같은 걸 통해서 볼 때는 시기가 보통 시기가 아니에요. 중국이 우릴 생각하는지 압니까? 3.8선은 미국이 만들었지, 미국이나 이런 나라는 자기 나라 국익만 생각하지. 다시 국민이 남북도 합쳐가지고 힘을 합쳐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렇게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제2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28:05
질: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민족 교육을 어떻게 교육받고 이어나가야 할까요?
답: 그에 대해 말은 많이 하는데. 일제시대에 배고프고 먹을 쌀도 없고 그런 고난도 겪었는데 그것은, 이런 말이 있잖아요. 자기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겁니다. 겪어봐야 알지 그 체험이란게 중요합니다. 그 시대에 고생하고 구박받는 그런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홍보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역사교육이 필요한 거예요. 아우슈비츠 기록도 이야기했지만 역사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이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교육도 필요하고 학교 교육도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국기 단 집이 별로 없습니다. 일세시대에 왜놈 시대는 말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나와 가지고 자녀들이 학교 교육을 이렇게 해가지고 동쪽으로 보고 절하라 하고 국기는 꼭 꼭 달고 그때는 왜놈 시대이긴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학교 교육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회교육도 필요하고, 또 하나는 민족정기를 살려야 되는데 민족정기를 살려야 하려면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존경 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배들이 나라 독립을 위해서 싸은 선배들을 보고 나도 그래야지하고 배웁니다. 그런 걸 천대하면 오히려 어떤 사람은 시대를 잘 파악을 못해서 그랬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사회 풍토가 이렇습니다. 그래서 이게 교육 탓이요 홍보 탓이오. 우리가 반성하는 동시에 홍보도 잘 하고 독립운동에 대해서 알게 하고 (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아침 아파트를 걷다가, 부산일보에 (나에 대한) 기사가 하나 났는데 (그걸 보신)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선생님 혹시 독립운동 하던 사람 아니냐 하면서 선생님 같은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고 고맙다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 오히려 그네들, 순수한 할머니 마음에 나오는.... 오히려 요즘 젊은 애들은 그렇게 생각 안합니다. 저쪽 부산 시장이 기념품 해서 우리 부산 시민과 같이 선생님과 같이 있는 걸 자랑으로 삼아서 이 패를 줍니다.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이 진짜에요 그 가짜 형식같은 건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육이라던가 사회 분위기도 그렇게 만들어야지 이런 독립 운동하는 사회 운동하는 사람을 국가가 대접하고 그렇게 만들어줘야 된다 말입니다. 독립 운동가 예우법이라는 걸 국가에서 정한 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우를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이 나라를 생각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 말입니다 이런 홍보를 위해서 촬영도 하고 녹취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런 것이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3:10) 정의로운 사회 바른 사회 문화적인 사회 이런 것들이 이뤄줘야지, 완전한 인류 성인 국가지 경계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 중에 지금보다 옛날이 낫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런 의미에서 진실한 하나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참 이렇게 완전 독립을 시키려면 이와 같이 우리가 이래야 합니다. 인간적인 사회 인간성이 바탕이 되야 합니다. 나는 종종 병원에 갈 일이 많아 의사들 많이 접합니다. 같은 의사여도 인간성을 품은 의사와 안 그런 의사는 완전히 다릅니다. 인간성이 있는 의사 옆에 있으면 오히려 더 낫는 거 같고 인간성이 없는 의사 옆에 있으면 오히려 병을 더 얻어오는 것 같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요새 정치계 법조계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근본의 하나의 바탕이 뭐냐면 정직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가 말하다시피 나는 사흘만 살다가도 죽어도 좋으니까 바른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게 바로 독립 정신이라고 봅니다.

35:02
질: 청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답: 역시 우리는 자기가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오늘 날의 교육은 자기만 생각하지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다운 인간 사람다운 사람 사람 사람답게 살아야 된다 그런 하나의 교육이 되고 그런 하나의 마음가짐이 되고 상대편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 그런 사회가 이루어지는 그런 노사 관계가 자동으로 해결이 되지요 상대를 생각할 때도 노사 관계 문제도 저 혼자만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 지역구만 생각하고 표만 생각하고 안 된다 이겁니다. 근본적으로 난 정직하고 정의로워야 되고 사람다워야 되고 난 이렇게 생각 합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이 자기들 분수를 모릅니다. 자기는 로맨스고 남의 일은 불륜이다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참.... 자기 입장 다 감춰버리고 상대방의 나쁜 점만 공격하고 정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통합도 안 되고 신뢰도 없는 사회는 차마... 신뢰는 어디서 나오냐. 정직에서 나오는 것이지, 거짓말하고 허위허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세 가지는 꼭 갖춰야 합니다. 아이큐, 이큐, 그다음에 엠큐. 다시 말하면 이성적인 면만 좋아서 좌뇌만 발달해서는 안돼요. 감성, 그러니까 우뇌도 발달해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윤리성입니다 윤리성 위에 이성도 있고 감성도 있고 그래야 합니다. 모든 학문의 상위에 차지하는 것도 윤리, 윤리학, 윤리성입니다 그러니까 사회 윤리학, 무슨 윤리학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도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 도덕성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관계 아닙니까. 인간관계가 뭐냐면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거 이게 있어야 되는 것이지, 자기 혼자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됩니다.

38:28
질: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답: 이런 사업을 한다는 게 이런 홍보를 한다던 가 이런 것을 하는 게 참 좋은 일입니다. 이런 것이 활발히 움직이고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나눔의 기쁨도 가지고 우리 주위도 잘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야지 이런 게 바로 독립운동이요 이런 게 바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정신분석학자가 인간은 원초적인 행복의 원인은 바로 인간관계랍니다. 인간관계 잘 되어 있어야지 상대를 배려하고 사회를 생각하고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게 잘 되어 있어야지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버드 학자가 사람들의 일생을 추적해서 그게 분석된 것이랍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인간관계를 잘하면 사회 제일 행복한 근원이다 이겁니다 결국 사람의 목표는 행복이 원인이 아닙니까. 그리고 사람은 남에게 베푸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어요 베푸는 그런 기쁨이 진실한 기쁨이다 생각 합니다 그게 진실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답게 인간답게 이렇게 살아야만 우리나라가 완전히 독립이 되고 빛나는 선진국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해방 후에 국가에 김구 선생님과 여운형씨가 있었는데 김구 선생은 해방되니 기쁘지만 우리 손으로 하지 못한 게 그게 참 원통스럽다라고 말했고.
(41:35) 여운형 선생은 좌익도 아니지만 중도였지만 그분은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이 우리가 힘을 써서 독립이 되었으니 참 기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따지면 둘 다 똑같이 기쁘다고 했지만 둘이 마음가짐이 다르다 이 말입니다. 나는 이걸 종종 씹어보고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앞에 김구 선생님 겸손한 의미에서 우리 힘이 아닌 외국의 힘으로 되지 않았습니까. 왜놈들이 그 삼팔선을 나눠가지고 죄 없는 한국을 가지고 고생하는 한국을 가지고 왜 이런 비극을 만들었나 이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외국의 요즘 정세가 한국이 그랬을 때와 비슷해요. 중국이 (우리 남북이) 통일되는 걸 원하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통일되면 저희 편을 만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일본사람들은 강한 사람한테는 약하고 약한 사람한테 아주 모집니다. 이게 일본 사람의 특성입니다. 근데 (우리가 통일이 되면) 한국을 깔보고 위안부가 어디 있고 독도가 어떻고 하는 그런 말을 낼 수 있겠습니까. 나도 그 때 위안부들을 봤는데, 그럴 때 위안부들 17~18세 여인들이 도망을 가고 순사들이 붙잡으러 다니고 그렇게 하는 걸 내가 봤는데, (그 사실을)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게, 자진해서 왔다든지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러시아, 중국, 일본, 미국 등 주변 국가들에 한국이 힘 못 씁니다. 그러니까 우리 내부라도 힘을 합쳐 가지고 (대응)해야 합니다. 마음을 합쳐서 대응해야 우리가 될 것이, 오히려 남북이 싸우면 앞으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요즘 우리 정세가 참 어렵습니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촬영 : 2014.04.18, 자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