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박기하

박기하 (1928년생, 경기 이천 출신, 국내 항일운동, 대통령표창)

이천에 거주하던 소년들이 1939년경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황취소년대’에서 회계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여, 밭을 개간하고 채소를 가꾸는 열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장호원 읍내 곳곳에 붙인 ‘한국독립과 민족단결’을 촉구하는 벽보를 붙였다가 발각되어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박기하는 항일벽보사건 이후 동료들과 연행되어 취조와 심한 고문을 받았다.

▶ 공훈록: 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10151&ipp=10000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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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활동에 참여하셨던 황취소년단/독수리소년단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나는 1928년에 장호원에서 태어났는데 그때의 장호원 심상소학교 다닐 때에 일본 정부가 전국에 소년단을 결성했다고. 만들어서 운영했는데 그 소년단은 봉사활동을 주로 했어요. 그런데 그때의 소년단이름이 황취소년대요. 그 소년대의 대장, 내가 대장노릇을 했어요.

질: 선생님께서 황취소년단에 가입하게 된 계기나 배경은 무엇이었으며,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답: 그런데 그때는 그 우리 집 근처의 @@@@소학교 3년 선배 박영순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우리 이웃집에 살아서 내가 노상 저녁에 놀러갔다고 말이야. 거기로 놀러가면 그 사람이 이야기를 잘 했단 말이야. 그 예기에 내가 @@가 되어가지고 노상 거기 가서 놀았는데 한때는 이 사람이 우리나라는 말이지 일본의 식민지이니까 여러가지로 참 일본한테 괴로움을 받고 있다 무슨 내선일체라고 말만 그러고 말이야 공무원들 봉급도 일본인들하고 우리 조선 사람하고 차이가 있단 말이야. 모든 것이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을 배척하고 독립을 해야되겠다. 그리고 해외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 그때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우리도 독립운동을 하자 그리고 결사단을 결성했어요. 비밀 결사단을. 박영순 소학교 선배가 그 형이 광산전문학교를 나와서 그 때는 이북이 다 조선 아니야. 함경도인가 어디가서 있었다고 그 사람이 거기서 중국하고 가까운 곳이니까 여러 가지 소식을 들은 모양이야 자신의 형한테 듣고서 우리가 독립을 해야 되겠다. 그렇게 박영순이 생각하고 또 박영순이 나를 설득하고 너도 커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인물이 되려면 독립운동을 같이하자 그렇게 해서 하게 되었지.

질: 구성원의 대부분이 10대 초반의 소년들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생각되는데, 어떠셨는지요?
답: 소년대를 모아서 동네에 있는 공동묘지에 가서 병정놀이 그런 것을 하고 담을 키웠단 말이야. 그리고 이제는 돈이 필요하니까 철도 연변에다가 채소 같은 것을 재배해서 돈도 마련하고. 그 때 회계는 주로 내가 맡았다고.

질: 벽보를 붙였다가 존재가 발각되었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답: 1942년에 박영순이 일본사람들을 배척하는 격문을 장호원 시내 일대에다가 붙였어요, 그 격문 내용은 일제는 곧 망한다. 그 때는 일본 애들이 중국하고 싸우고 미국하고도 싸우고 그랬거든 막 이놈들이 말이야. 그래서 ‘일본은 금방 망한다. 절대 일본사람에게 협조하면 안 된다.’ 조선민족은 단결해서 자주독립을 해야만 한다. 이런 격문을 장호원 가게, 벽, 자동차(버스) 정류장에다가 붙이고 자동차에도 붙이고 또 군수들에게 격문을 우편으로 붙이고 했어요. 그것을 붙이는 사람은 소년대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김만식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시켜 붙였단 말이야, 그것을 붙인 날이 1942년 3월 19일이야. 18일인가? 붙였다고. 아침에 그것을 붙이고 난 후 일본 주재소 순사부장이 나와서 격문이 여기저기 붙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수소문 했어요. 이것을 누가 붙였냐고 말이야, 김만식이라고 하는 소학교 학생이 (격문을) 붙였다는 것을 확인했어. 그래서 김만식을 잡아들였다고. 김만식을 취조를 해서 ‘우리 독수리소년단에서 주어서 붙였다’ 자백을 해서 단원 14명 중 13명이 잡혀서 들어갔다고.

질: 체포된 이후의 상황이 궁금합니다.
답: 그 날 밤중에 장호원 주재소 유치장에 갇혔어요.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경기여객 자동차(버스)를 타고 이천경찰서로 갔어요. 저기 장호원 주재소에서 송치하러 갈 때 자동차 타기 전에는 우리 가족들이 전부 나와 울고 어머니이건 아버지이건 할머니이건 나와서 울고불고 했다고, 이천경찰서의 유도장에 잡혀 들어가 수갑을 채우고 취조를 받고 그랬어요. 그 경찰서에는 경찰 서장 일본 사람이 있고 조선인 사법주임이 있고, 일본인 형사주임이 있다고. 그런데 거기서 취조를 받고 유치장으로 들어가는데 유치장 들어갈 적에는 뭐 @@ 풀리는 것은 다 빼버려 그때 이천경찰서에는 두 개의 유치장이 있었는데 박영순은 다른 유치장에 넣고 우리 13명은 또 다른 유치장에 넣었다고. 거기서 우리가 5개월간 있었다고 5개월간 갇혀있었다고. 그리고 8월31일 날 집에 와서 있는데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 미해결로 나와서 어디를 가려고 하면 주재소에 가서 신고를 해야지만 가 (율명월포리?)가 고향인데 장호원에서 가는데도 주재소에 가서 “거기간다” 라고 말해야 보내준다고. 11월31일 날 경성 지방법원에서 우리를 기소유예 처분을 해서 완결이 되었어요.

질: 해방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답: 개성 송도 중학교 다닐 때 해방이 되었는데 그때는 중학교가 공부는 안하고 봉사활동만 해. 김포공항이나 금포에 가서 창고 대지 조성을 한다거나 이런 거는 다 학생이 하는 거야 김포공항도 학생들이 다 닦은 거야. 학생들이. 그래서 나는 학교를 주로 안다녔다고 집에서 있었지 그러다가 해방이 되어버린 거지. 그러고선 학교를 갔다가 송도 중학교를 갔다가 금방 양정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개성에서 양정중학교로. 그리고 양정중학교 6학년을 졸업했어 그때는 중,고등학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닐 적에는 6년제야 1학년 입학하면 6학년까지 다니고 대학을 가는 거야 6년을 마치고 그 후에 나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들어갔지 수원농대 그때는 수원에 있었어 거기에 내가 들어갔다고. 거기를 다니는 동안 2학년 때 6.25사변이 터졌어. 625사변이 일어나서 그때 나는 간부 후보생으로서 광주 육군 보병학교 졸업을 했어 82기로. 그래서 육군 소위로 임관이 되었어. 그래서 6.25참전 용사라고 내가 지금.

질: 독립운동가로서 후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답: 그 예기는 우리나라는 하여간 나라가 잘 살게 발전해야 하고 경제적으로. 지금 경제적으로 우리는 세계경제 10위 안에 들어간 경제대국이니깐 바랄게 없지만 더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또 안보의식을 굳게 가져서 또 다시 그러한 국치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적들에게 내키지 않도록 각성해야 되겠다 그거야.

질: 그 외에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답: 지금 일본 아베총리가 우리를 얕보고서 위안부 사죄도 안하잖아. 그거는 우리를 식민지 국민이라고 @@ 봐서 그런 거잖아 나는 광복이 되었다 하더라도 완전히 광복이 아닌 거야 지금. 그 전에는 우리 한반도가 3천만 민주들이 같이 살다가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마자 강대국들에 의해서 3.8선이 만들어진 거야. 소련하고 미국 이 사람들의 장단에 의해서 3.8선을 만들었다고. 사실은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반으로 쪼개버려. 나쁜 놈들은 일본인데 일본 놈들은 반으로 쪼개지 않고 우리 백의민족을 반으로 쪼개 놓은 것은 참 비운이야. 벌써 광복 70주년이라는 것은 분단되어서 70년 동안 살아온 거 아니야 앞으로도 빨리 통일이 되어야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이야. 조그만 나라가 나누어져서 또는 동족끼리 말이야 이북 놈들이 엊그저께 지뢰를 @@@ 가지고 우리 젊은 군인들이 다리를 잘려버리고 그런 나쁜 짓만 한다고 같은 민족인데 말이야. 우리 조선민족은 하여간 나쁜 민족이야 아주 악질이야. 독일을 보라고 다 통일이 되었잖아. 우리같이 남북으로 갈러져 있던 독일이 동독 서독이 합쳐졌단 말이야. 그런데 서계유일하게 우리나라만 지금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져있어 이북에는 무슨 @@왕권 같이 말이지 김정일 손자 김정은 대대손손으로 그런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어. 빨리 우리는 통일이 되어야지만 우리나라가 살 수 있다고. 내 염원은 @@@ 통일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야.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촬영: 2015. 8. 13, 자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