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이종열

이종열 (1924년생, 경북 예천 출신, 광복군, 건국훈장 애족장)

1945년 1월에 중국 호북성(湖北省), 신점진(新店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유격부대에서 유격전과 적 정보수집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후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입되어 전방공작원으로서 대적 정보활동 및 한·중 합동작전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공훈록: 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6154&ipp=10000



<녹취록>

00:00
질: 일본군에는 어떻게 들어가셨나요?
답: 우리나라가 일본 놈들 식민지정책 받았잖아요, 그 당시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나이가 16세 18세 15세 20세 23세 거든, 전국적으로 왜놈들 군사훈련 받았어요. 지방에서 그래가지고 군사훈련을 한 3,4일간 받고 왜놈들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대동아전쟁 전쟁터를, 대동아전쟁 미국사람하고 전쟁 붙었다고 제 1선에 전쟁하러 가라고, 군을 출동 시켰어요. 그 당시에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유학 가던 사람들 대학생, 유학생들 전부다 한국에 독립운동 설치한다고 말이지, 소문이 나가지고 일본 유학 갔던 사람들도 전부 군에 출동 다 띄우고 우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도 군사훈련 받은 사람들 체격 심사훈련을 해가지고 갑종합격을 받은 사람들은 전부 군에 나갔어요
 
01:18
질: 갑종학교가 지금으로 말하면 군사학교인가요?
답: 그렇지, 군에 가려고 체력검사를 하면은 갑종합격을 받은 사람은 가고, 지금 멀쩡하나 병적(이 있다고) 받은 사람은 못가잖아 그 당시도 우리는 갑종합격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사람들 @@에 맨 선발로 먼저 갔어.
 
01:50
질: 일본군에선 어떤 일을 시키셨나요?
답: 일본 군대에 가서는 군사훈련 식으로 총 쏘고, 무기수리하고, 장치해가지고 총 쏘고 이런 군사훈련 받았지.
 
02:05
질: 입대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
답: 지방에서 농촌에서 살면서 농사지어가면서 농사일해먹으면서 그 당시에 면 소재지의 국민학교[초등학교] 그 일본 놈들이 일본 놈들 와서 선생을 해서, 국민학교에서 군사훈련 시켰어. 그때 군사훈련 받았다고. 그때, 국민학교 졸업을 한 사람은 이름이 세이넨 군련소라 하는 곳에서 훈련을 받았고, 국민학교를 (학업을) 먼저 끊고, 중도에 자퇴(<폐지)했던 이런 사람은 @@@@세이넨 군련소라고 했어, 특별훈련소고, 왜놈말로 @@@@에 들어 가는게 특별했다 그러더라고
 
03:17
질: 참전도 하셨나요?
답: 전쟁도 이제 참여하는 거지, 군사 다 마치고 최전방으로 훈련하러 나갈 때 그 때 미국사람들 비행기와가지고 폭격하고 야단이, 전체가 물바다가 되고, 야단이 났었어, 그 당시 전쟁을 그렇게 심하게 했어.
 
03:34
질: 일본군을 탈출하게 된 배경은?
답: 왜 탈출을 했냐면, 이제 여기 있죠. 여기 탈출했던 사람들이, 이게 내 이름이야. 내가 이 사람들을 다 선동을 했어요. 도망가자, 도망가자. 그 원인이 왜 그랬냐, 우리가 일반사람들 군부대에 입대할 때 평양, 지금으로 말하면 김일성이 별장 지어놓은 @@@ 대동강 @@@@@@@, 거기에, 왜놈군대가 왜놈말로 가네하라 연조유 니부다이라고, 보병소총대가 그 부대가 거기 있었어, 그 부대에 입대를 했는데, 거기에, 일본 학도병으로 갔던 사람 아까 내가 이야기 했잖아요 강제로 일본군에 입대할 수 있다고 그 사람이 거기일반 그 부대에 나와 있는데, 지금 현재 말로하면 상사, 그 당시에 일본사람들은 뭐라 불렀냐면 조또에라고 불렀어요. 특무상사를 상산데, 그 양반이 너 왜군에 왔느냐 물어 지금 현재 일본 사람들이 전쟁을 하면서 승리를 하려고 우리를 붙들고 그러는거 아니냐, 잘 못 생각했다. 아니다.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 자손인데, 죽어도 단군할아버지를 위해서 죽고, 살아도 단군할아버지를 위해서 살아야하는데 지금 현재 너 내일모레 출발하면 끝인데 만일에 군복이 동복이 나오면 여기 있는 날보다 더 행복이고, 하복을 입게 되면 너넨 영원히 못 오고 죽는다. 하복을 입으면 남한군도, 남한군도라고. 동복을 입게 되면 북경에 가는데 북경에 가면 @@ @@@@@ @@@@@ 기다린다. 죽더라도 탈출해 가거라. 그 양반이 그렇게 가르쳐줬어 그래가지고, 이 사람들이 일본군대의 우리 앞뒤에 있는 부대고 그런데 여기서는 그 얘기 들은 사람이 나 하나뿐이어서 내가 이 사람들을 다 선동을 해서 같이 도망을 갔어.
 
06:30
질: 일본군 탈출하셔서 광복군까지 가시는데 걸리신 기간은?
답: 시간이, 한 2개월 넘게 걸렸어요. 왜 그러하냐, 여기에서는 @@를 해가지고 중국 사람에 연락해가지고 중국 사람이 연락해줘서 중국 군부대에 들어가서 그래가지고 유격대라고 군부대에 들어가 가지고 그래가지고 심사 훈련받고 전부 몸에 있는 우리 무기라던가 몸에 있는 것 전부 반납하고, 그래가지고 그 단원들이 중국 사람들 유격대 중대장들이 우리를 유격대 @@사령부로 인솔해줘서 @@사령부가서는 거가서 또 @@를 겪다가, 그 또 거기 가서 @@사령부서는 또 여수 @@이라는 곳으로 그걸 넘겨줘가지고 또 거기 가서는 또 넘겨줘서 또 다른 곳으로 가서 거가서 또 넘겨주고 또 넘겨주고, 보행으로 걸어간 날짜가 한번은 16일을 걸어갔고, 또 한 번은 23개월을 걸어갔고, 그걸 보행으로 걸어서, 그래가지고 @@가 한두 달 20일 걸렸는데 어디까지 갔냐면 호남선 대동, 호남선 대동으로 가니깐 우리 한국 광복군 임시정부에서 파견 나온 선배가 있다, 그래. 그래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 하니깐 @@해가지고 그러면 둘이 중국사람 옷을 @@@@ 그걸 입고 머리를 이렇게 깎아가지고, 그래가지고 여기 있는 동지들이 한국에서 온 동지다 놀라지 말고 여기 여@사람들 보는데 반갑다고 울지 말고, 눈물도 흘리지 말고 가만히 거기 앉은 자세하고 들으라고, 우리가 바로 광복군 임시정부에서 나온 사람인데 당신들이 여기 온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가 파견 나왔으니깐 이제는 여기 잘 찾아왔다 여긴 중국 사람이 현 정부 경찰서인데 경찰서안에 @@@@ 여기에 상어들을 큰걸 두 개 @@니깐 이제 잘 왔다고, 찾아올 대로 다 왔다고 여기가 광복군 임시정부라고 여기서 연락을 받는다고 그래가지고 선배들이 하나는 황해도 진주 사람이고 또 한분은 경상도 문경 사람이고, 그 둘이요. 그래가지고선 있는데 중국 사람이 @@장군 지시라 해가지고 4명승 5명승 중국사람들 군부대 65연대 60연대 80연대 85연대 전부 각조에 너희 다섯은 파견 나가가지고 전부 공작대로 그러니깐 전부 다 @@@했지.
 
10:21
질: 거기 가셔서 번역일도 하시고 하신거에요? 일본어 번역도 해주시고 하셨다면서요.
답: 그럼, @@를 따라다니면서 중국 사람들하고 일본 놈들하고 전투하려고 준비하려고 작전 @@가 있으면 그거 다 하고, 같이하고 또, 포로 @@@ 꺼내가지고 수용소로 보냈고, 또 다 마치고 같이 후퇴하고, 그 똑같은 중국 사람들 군이라고 똑같은 행동을. 그래가지고 거기에서는 우리 한국인들이 그 위에 우리 @@@@한데서 멀리있는 사람이 한 160명 되는데 3사람 4사람 5사람 있는데 전부 나눠가지고 분산되가지고 중국사람들 군부대 65연대 70연대, 뭐, 사람 되는대로. @@@해서 파견나갔어요. 파견나가가지고 대동아 전쟁할 때 파견가서 @@@@@ 그래가지고 왜놈들 전쟁하다가 포로로 붙들리면 붙들고 끌고 오면, 중국사람들은 군인들은 일본말을 모르거든, 그래서 우리 한국사람들이 좀 있으니까 그거 붙잡아가지고 너 어제 너 @@교대로 어디있었냐, 뭐했냐, 뭘했냐. 그거 다물어봐가지고 포로수용소로 보냈어요. 그런 작전하다가 8.15 해방됐다고 방송이 나와 가지고 그러고 있다가 나중에 한국 광복군 임시정부가 나온다고 가서 @@@@ @@가지고 상해까지 가서는 그래가지고 김구선생하고 이범석 장군 이제 그 사진@@ @@@ 장군, 그런 양반들이 무기를 완전 무장해가지고 한국에 가자. 어쩌자고 그러냐니깐 중국 사람들은 남의나라라고 하고 미국사람들은 자기네 @@@@인데 무기를 해가지고 오면 안된다. 그냥 오라. 그래서 못하게 해서 그냥 맨몸으로 한국에 왔죠. 한국에 와서 인천부두로 오니깐, 아니, 부산부두로 오니깐 부산부두에 @@@@이 생겼다고, @@@@@ 그곳에 못 내리고 인천으로 돌아서 인천에서 와서 이렇게 해가지고. 그래, 인천에 와서는 이랬어요, 그러니깐 뭐냐면 @@@@@ 미국사람하고 광복군 총사령관 이범석 장군하고 친구여서 잘 아는 사이에요. 그러니 @@에 있다가 그래가지고 인천부두에 와가지고 내렸는데 내려가지고 미국, 그 당시엔 뭐냐면 미국사람들 군사훈련하고 전부 미국사람들 @@하니깐 우리를 미군부대에 각 @@으로 나가가지고 파견장소로 가서 군사훈련 다 받았으니 가라고 이랬는데 그래가지고 우리, 채병장이 딱 뭐라 한마디 하는거야. 우리가 한국정부에서 단독으로 하는 거면 백번이라도 군사훈련 하겠지만 미국사람들 군사에 지지해선 @@할 수가 없다 없으니깐 우리는 해산해서는 고향으로 가있을게, 고향에 가있을테니 필요하면 소집해라. 그래서 해방되고 고향으로 갔었지
 
14:51
질: 당시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답: 남는 게 뭐냐면, 나라 없는 게 제일 불쌍해요. 그런데 가서는 어디서 뭘 하다가 잘못해서 영창을 간다던가 맞아죽던가 총에 맞아 죽던가. 그러면 나라가 있으면 대사관이고 뭐고 있어서 그런데도 @@@@@@있지만, 우리 그때를 봐서는 말이지, 한국개발식민지개발에 왜놈들 @@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못 얻어 먹었다가 죽어도 말도 못해요. 아무것도 못해요.
 
15:31
질: 광복 이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 나는, 그 전에 집에 와서는 고생도 많이 했고 그런데 또 어떻게 군 복무를 해가지고 앞으로 @@ @@@@@ 그런 것들을 생각을 해보니깐 부모들이 말려, 여태껏 고생을 많이 했는데, @@ @@랑 결혼 해가지고 집에서 살지 이제 또 무슨 그러고선 나갈 거냐 그렇게 자꾸 말려서 그래서 안가고 고향에서 농사도 좀 짓고, 좀 살다 그래, 서울로 왔지.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촬영: 2015. 8. 3, 자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