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조영진

조영진 (1922년생, 경북 문경 출신, 학생운동, 대통령표창)

대구사범학교 3학년 재학 중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결성한 학생비밀결사 '문예부(文藝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문예부는 민족성이 담긴 역사서나 문예작품을 읽기 위해 비밀리에 운영한 윤독회를 기반으로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1) 부원은 비밀을 엄수할 것 2) 부원은 매주 토요일 각자가 쓴 작품을 가지고 참석하여 이것을 감상 비판하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것 등을 활동 방침을 정하고, 학교 내 다른 비밀결사들과도 교류하며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또한 부원들의 작품을 수집·정리하여 비밀출판물로서 『학생(學生)』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활동보고서가 발각되면서 일경에 피체, 3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공훈록: http://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10073&ipp=10000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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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문예부’가 어떤 조직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 한마디로 말해서 이 땅에 태어난 우리 한겨레가 말도 우리말을 못하게 하고 역사 가르치는 것이 우리 역사는 아예 무시해 버리고 일본 역사만 가르치고, ‘이건 아닌데?’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났으면 우리말을 해야 되겠고 더구나 그 사범학교는 장차 교사가 돼서 나갈 판인데 내 스스로가 ‘우리말도 모르고 우리 역사도 모르면서 뭘 가르치려고 여길 와 있는가.’ 이런 의문을 가졌다고요. 그래서 우리말을 하기 위해서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문법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계셔서 그 책을 보고, 또 이제 역사 같으면 육당 최남선의 <고사통>이라는 우리나라 역사책이 있고 또 문학 같으면 우리말로 춘원 이광수가 쓴 <흙>이니 하는 그런 소설도 읽고 역사책 갖다가 공부하고. 친구가 우리나라 책을 구해 와서 읽으면 그 다음 친구한테 돌려주면서…. 말하자면 윤독이지. 이 책은 읽을 만하다 싶으면 (그렇게 읽었지.) 이건 일본 사람들이 못하게 하니까 들리면 안 된단 말이야. 몰래 이제 그(돌려보는) 정도지, 이게 독립운동이다 이런 의식도 없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럼 일단 우리말로 우리 역사를 알아야 또 선생질을 할 거고 그렇게 출발한 거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거야.
 
2 : 08
질: 학창 시절, 당시의 상황은?
답: 일본 사람들이, 더군다나 사범학교라는 것은 전체 선생 다 일본 사람이고 한국 선생님은 세 분 밖에 안 계셨어.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어른이 그 당시에는 우리말을 조선어라고 했거든, 조선어 과목을 담당하다가 그것도 폐지가 되고 말았지. 그 선생님은 그 시간 중에 한해서 조선말을 하고, 복도에 나가서부터는 조선어를 못하는 이런 기형적인 생태가 그 당시의 교육이란 말이야. 일본어 상용. 늘 쓰라고 해서 그 당시에는 일본말을 국어라고 했거든? 국어 상용 운동을 해 가지고 우리말을 (못 쓰게 했지). 심지어 기차역에 가서 기차표를 사는데, 시골 어른들이 일본말을 모를 거 아니겠어? 일본말을 해야만 차표를 팔아. 그러니까 ‘차표 주십시오.’ 하는 말을 일본말로 하라고 강요를 할 정도로 굉장히 억압감을 느꼈죠.
질: 문예부 조직 당시 학생이셨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할 생각)을 하신 거예요?
답: 아니 글쎄, 자네(질문자) 같아도 우리말도 못 하게 하고 우리 역사도 (못 배우게 하니까) 이건 비정상이다(생각했을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정상화하고 싶었던 거예요, 다른 게 아니고. 원래, 본래 태어난 대로 사람답게 살고 싶다. 그건 시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인 거라. 다만 어떤 것을 중점으로 역사를 해야 할까.. 그런 상황에선 사람으로선 으레 반항할 건 반항해야 하고 감춰야 할 건 감춰야 하고 이렇게 하다 보니 그렇게(문예부를 조직하게) 된 거지, 꼭 그때 비밀결사를 하겠다 이런 생각은 없었어. 좋은 책이니까 친구한테 권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 비밀결사라고 불린 거지. 그냥 친구한테 책 빌리고 빌려 주고. 그리고 토요일에는 연애하러도 못 가 보고. 그렇게 사귄 친구랑 선배들하고 하숙집에.. 돌아가면서 이번 토요일에는 어디 모이자, 교회에 가서 모이자, 냇가에서 모이자 하면서 책 읽어서 독후감도 얘기하면서 역사에 대해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토론하게 되고 그렇게 인간적인 성장을 스스로 도모하다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보기엔 저 사람들은 불온하니까 안 되겠다, 비밀결사다 이렇게 몰아붙인 거지요. 정보당국에서 그런 식으로 몰아가 버렸죠, 우리들을. 그땐 경찰서장이고 뭐고 전부 다 일본 사람 아니오? 바로 불온분자라 하지, 온당하게 사는 게 아니고. 이쪽(한국)에서 생각하기에는 온당하게 살려 하는 것이 그네들을 지배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불온하게 보고. 미국 사람이 볼 때 나쁘다고 우리를 억압하면, 우리가 반항할 거 아니겠어?
 
06 : 14
질: 문예부 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답: 아니 그러니까 그 당시에 우리나라 전래 노래, ‘시조’라는 것이 있잖아, 애국 시조를 그 선생님이 100수를 외우라는 거야. 몰래 100수를 외우라고 하면서 지금 같으면 인쇄술이 되니까 그 당시엔 줄판에 강판에 써 가지고 이걸 밀어 가지고 몰래 그 선생님이 우리한테 나눠주고 해서 그걸 가지고 열심히 시골에서 와 가지고 선생님이 외우라고 하니까 열심히 외웠지. 그래서 그 선생님한테 인정을 받고. 대전 형무소 갈 때 그 어른도 같이 결국은 형무소 가셨어.
질: 선생님, 그러면 안에서 책 구하시기가 힘드셨을 거 아니에요.
답: 그래요. 책방에 한국서적을 파는 집이 있고, 대부분이 일본 서적을 팔아요. 아까 말한 대로 최남선의 <고사통>이라든지 춘원 이광수의 <사랑>이니 <흙>이니 하는 것은 절판이 돼 버린 거야. 될 수 있는 대로 저 사람들(일본인들)이 보기엔 출판 안 했으면 좋은 상황 아니겠어? 그러니까 읽은 것을 돌려 보고 학생들이 돈이 없으니까 서로 돌려 보는 것이 그 당시에는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비밀결사다 해 가지고 끼리끼리 토요일 되면 여기 모이고 저기 모이고 하니까 굉장히 참 불온하게 봤지.
 
08 : 16
질: 체포되었을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답: 그 당시에 1학기가 끝나고 방학을 하고 2학기 개학이 그 당시에 9월 초하루가 2학기 개학이에요. 개학을 해가지고 첫날인데, 학교에서 세 시간 수업하고 네 시간하면 밥 먹을 판인데 형사들이 경찰이 학교 교무실에 와 가지고 세 사람을 잡으러 와서 교무실에서 ‘교무실로 오너라.’ 해서 나가니까, 형사들이 대기해 있다가 ‘너희 집에 같이 가자.’ 그래서 집으로 가서 책상이고 뭐고 말하자면 ‘가택 수색’을 당했죠. 그래서 무슨 책을 보는지 뭐 무기를 가졌는지 별별 것을 다 뒤지지만 뭐가 있나? 그냥 학생 공부하는 노트 있고 다 그런 거죠. 그래서 책 몇 개 가지고 이런 식으로 경찰서에 가 가지고 무조건 감방에 집어넣더라고. 그래서 자고 나니까 그 다음 날 데리고 그 사건이 충청남도에 선배들이 가있다 터진 사건이니까 전부 충청남도로 몰았어요. 감방이 경찰서마다 방이 있을 거 아냐. 공범자들은 서로 얘기를 맞추기 때문에 공범자들은 지금도 그 때도 한 방에 같이 안 넣어요. 다른 방에 넣게 할 거 아냐. 그래서 이제 충청남도에 유치장에 방이 빈 데로 돌아가면서 우리 사건 (관련된 사람들)을 집어넣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나는 공주, 충청남도 공주경찰서가 감방이 4개 있는데 네 사람이 배당 되어 가지고 방방에 하나씩 (수감되었고), 딴 사람은 뭐 대전, 부여 이렇게 (수감되었어요.). 콩밥 잘 얻어먹었죠. 근데 콩밥도 정말 그 당시엔 식량이 귀해가지고 콩·보리밥에 말이죠, 참 초라한. 배가 무척 고팠어요. 그러다 대전 형무소에 미결감으로 넘어갔어요. 이제 검사국으로 넘어가면 검사국에서 형을 받으면 죄수복 입고 하지만 이건 미결이니까. 거기 가니까 콩밥을 주는데 양도 많고 영양가도 훨씬 낫고 배도 덜 고팠지요. 전혀 그네들은 면담도 안 시키고, 돈도 안 받고, 하여간 억압하려고 배고프게 한 거죠.
 
12 : 16
질: 그 당시에는 대부분 사상범으로 잡히셨겠네요?
답: 전부 그렇게 됐지. 그러니까 우리가 학생운동을 하다가 졸업을 하면 그 당시에 각도에 다 선생으로 나가는 거야. 함경도까지 평안도까지 이제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강원도 이렇게 퍼지면 그 선생들이 또 학생한테 우리말 시조도 가르치고, 이러다가 충청남도에 어느 선배가 선생으로 나갔다가 거기서 이제 시조 가르치다가 집에서 보니까 뭐 조선말로 우리 시조를 하니까 일본 형사가 알고서 그거 뒤지다 보니까 어디서 나왔나 해서 사건이 전부 전국으로 다 (확대되어) 잡혀 들어갔지. 몇 십 명인지 백 명이 넘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숫자는 모르겠어. 그렇게 한 선생이 그러니까 같이 다 보니까 재학생 중에는 그때 그 당시에 나는 제일 하급생이라 다 졸업을 해가지고. 참 지금 생각하면 그건 요새 말하면 동아리 운동이랑 똑같은 거야. 그 이상도 아니고 그러니까 일본 사람이 봐선 불온하지만 우리로서는 가장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건전하게 살려고 한 거지요.
 
13 : 54
질: 경찰서에서는 언제 나오셨나요?
답: 몇 달 있다가 날짜는 다 잊어버렸고. 아까 말한 대로 대전 형무소 미결로 넘어갔다가. 그리고 제일 하급생들인 우리가 (재학생이었고, 이 사건에 연루된 선배들은) 다 졸업 했는데, 나는 세 사람 동기가 같은 사건에 걸려 가지고 7년간 기소 유예로 무사히 나왔지. 그 당시 선생님도 무사히 기소 유예로 (나오셨어요.)
 
14 : 40
질: 해방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답: 그렇게 하니까(독립운동으로 기소 유예를 받고 출소 한 이후니까) 그 다음엔 어딜 가도 불온분자라 해 가지고 어딜 가도 신고를 하라 하고 이 모양이 되는 거에요. 도저히 여기서 배겨 날 수가 없으니까, 중국 북경으로 말하자면 밀항을 했죠. 그 당시에 비자가 나올 턱이 없는 거야. 그럴 거 아니겠어요? 여권이 나한테 나올 턱이 없으니까 밀무역 하는 사람들 루트를 알아 가지고 압록강 건너면 만주고 쭉 내려가서 산해관 건너면 중국 본토란 말이야. 그래서 밤중에 기차를 (타고 밀항을 했어요.). 한 가지 일화를 말하자면 말이지 고등계 형사들과 헌병들이 어딜 가면 차에 오르고 내리는 걸 미리 다 아는 거야. 그러면 플랫폼에서 탈 때 도로 그네 들을 멀리가게 해야지요. 저만치 가면 바로 요만치 뒤에 따라 오면, (일본 고등계 형사들과 헌병들은) 그들과 먼 데 있는 놈들에게 관심 가지지요. 그러니까 그 당시엔 퇴학 맞았지만 교복 딱 입고서 학생이고 하니까 졸졸 따라 다녀도 그 놈들이 전부 의심을 안 하는 그런 (상황을 연출해서 북경까지 갔어요.) 사람이 머리가 환경에 따라서 자연 면역성이 되는 거야. 그런 식으로 국경을 안동으로 해서 산해관 넘어 가지고 무사히 북경까지 갔어요.
(16:34) 해방 후만 해도 북한하고 대립되다 보니까 무척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도 주변에서 많이 봤어요. 선생일 하고 있는데 동료가 많이 잡혀가고. 그런 경험을 해방 후에도 겪었고. 또 6.25 터지니까 난 대구에서 교원을 하다 보니까 피난하고 참 다행이지요. 그 대신 학교가 군에 의해서 점령을 당했어요. 그래서 전부 방천으로, 나무 밑으로 가서 그렇게 수업을 하고, 참 그것이 어제 같은데. (질: 그 때가 다 생각이 나세요?) 그렇죠. 그거 뭐 제자 해 봐야 벌써 이제 팔십이 다 된 애들인데... ‘선생님’ 하고 그렇게 농담도 거기서 열리고, 그렇게 남학교로 갔다가 대학교 갔죠.
 
17 : 36
질: 독립운동가로서 후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답: 사람이 사람답게 살라 그거야. 그러니까 자기의 진로가 어느 방향으로 나갈까 하는 것은 항상 고민하면서 자기 개성과 자기 환경에 따라서 맞게 진로를 선택해야 할 것이고, 그에 따라서 인간으로서, 역시 그래요 사람 머리라는 건 비슷해요 그런데 이제 문제는 ‘꾸준히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그 성과는 차이 난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생 되고 그러다 보니까 또 고등학교 선생이 되고 대학교 선생 되고 학장도 하고 이렇게 한평생 지내고 국사편찬위원회 가서 책 내고 그렇게 살아온 거죠. 언제 세월이 흘러갔는지 참 주마등처럼 세월이 빨리 흘렀구나 이런 느낌이지요.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촬영: 2015. 8. 12, 독립유공자복지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