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임우철

임우철 (1920년생, 충남 연기 출신, 학생운동, 건국훈장 애족장)

1941년 4월 동경(東京) 공옥사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한 후, 동급생들과 함께 1942년 12월까지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이용해 한국인으로서의 자각을 키울 필요가 있으며 귀국하면 한국인만의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을 육성하고 공업학교의 교원이 되어 청소년을 훌륭히 육성하는 한편 한국어를 널리 보급하여야 하며 궁성요배(宮城遙拜)는 불필요하다는 등 민족의식을 함양하다가 피체되었다. 1943년 12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공훈록: http://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9454&ipp=10000




<녹취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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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항일운동은 어떤 계기로 하시게 되었나요?
1940년대 그때부터 지원병이 생기고 창씨 개명을 하라고 의무가 있었는데 한국사람들은 그 사람을 듣고 했는데 나는 창씨 개명을 하지 않고, 지원병 문제 관해서도 나는 반대를 했고, 또 그 당시에 일본에 신사참배도 천왕이 돼서 동방에 하라고 했을 때도 나는 그 당시에 극히 반대를 했다고, 일본에 가서 요즘에 각 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 같은 거 하잖아요. 그 때 당시에도 그런 게 있었는데, 한국 사람만 하고 그랬는데 그 당시에 선배에 노경원 이라는 함경도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 이리 고생하느냐 해서 국권을 뺏겨서 그랬다. 그러면 국권을 회복하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일본에서 이런 운동을 하자 해서 그래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되찾자 해서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독립을 시켜야할까 하는 일념 하나로 천왕이 살고 있던 궁 앞을 지나갈 때 우리는 각자 독립에 대한 가치들을 이야기하고, 그 당시 학교가 야간학교였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자료실이 있어 가보니 그 위에 지도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차자 그 사람들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왜 묻지 않았냐고? 뻔한 게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했으니까. 동경시에 근무하곤 했을 때는 거기서 나오는 봉급판을 가지고, 내는 수업료와 떼는 돈들도 참고서들도 살 수 없어. 참고서 사기 위해 치바라고 하는 곳이 있어. 외국에 다니는 배가 돌아다니는 ,,,, 그 작업을 하는 거야. 그 당시만 하더라도. 5원인가 7원인가 받았어. 그걸 며칠만 하면 참고서를 살 수 있었어.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한 친구는 여기서 이 배를 그대로 타자 하면 하와이나 다른 나라를 갈 수 있었는데 그렇게 이야기 하고 했다. 하와이 가야겠다고 생각도 했어. 왜냐면 어떻게 하던 내가 일본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생각했어. 하지만, 나갈 힘도 없고,..
 
07:41
질: 체포되었을 때 당시에 상황은?
그 해 12월 8일인가 10일엔가 그 때 학교에서는 시험을 다 치르고 나와보니까 형사가 네 사람이 왔는데, 네 사람들이 임우철이하고, 나하고, 등등 불러서 그대로 체포가 됐어. 체포 돼서 시나가와 경찰서에 가서 사흘인가 나흘인가 잤어. 나흘 동안에 이상한 얘들은 사방에 우리 뒤를 조사하고, 심지어 우리 하숙집에 가서 조사해갔다고 그래. 그래서 그 때 두 사람은 와있고, 와보니까 김제 사람인데 김제 경찰서에도 두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83년 봄에 그 사람들 얼굴을 서로 만날 수 있었어. 그 때 당시는 미혼이니까 43년 7월에 그 사람이 감옥에서 죽을 것 같으니까 내보내고, 그 집에서는 살려볼려고 했는데 결국 45년 8월 13일에 결국 사망했습니다.
 
12:46
질: 수감생활은 어땠는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건강에 조심해야하고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니니까 우리가 건강을 지킬려고 각자 운동들을 하고, 또 한 가지는 죄수자들에게 우리가 독립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려줬어요. 하지만, 일본사람들하고 결혼하고 이름도 바꾸는 사람들도 있었어. 그래서 다들 욕하고 손질하고 했어.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포항 친구가 있었고, 연정에 다니다가 두 번 체포된 사람들도 있었어. 그래서 앉기만 하면 나라 형편을 항상 염려하고 그랬어, 곧 해방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해방될거라는 희망만 갖고 있었지.
 
16:25
질: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어떠셨나요?
그 때서야 우리 세상이 되었다. 나가서 무엇을 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지. 나라를 행정하는 사람은 난 아니다. 나는 기술자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나와서 기술을 배웠어.
 
17:34
질: 광복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46년까지는 감옥에서 나와서 몸도 쇠약하고 사회적으로 무시하곤 했는데 그래서 우리가 처음 나와서 그 당시 정세가 좌다 우다 해서 굉장히 심해서 우리는 좌에는 있다가 지금은 북한이 되었지. 우리는 거기서 오래 있으면 안되겠다 생각해서 나왔지. 그래서 충남으로 갔는데 1947년 2월 1일부터 5일까지 쉬고 5일부터 충남에 발령나서 거기에 있다가 6.25 사변 후에는 선배들도 있고, 지금 한국전력으로 내려갔지. 그 당시에 55년 정년퇴직을 하고, 그 전에 우리는 기술사니까 쉴려고 했더니 여기저기 일하다가 건설업까지 일했지.
 
21:34
질: 독립운동가로서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 마디는?
선열들이 안중근 의사라던지 윤봉길 의사라던지 그 사람들은 활약이 잘 보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잘 나타나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다라는 것을 우리는 인지를 해야 하고, 특히 안중근 의사는 아직까지도 모시는 절이 있어. 동부에 그래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어떻게든 찾아야지. 살아있었을 적 유언이 자신이 죽으면 꼭 조국에 유해를 모셔달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어. 남북은 무조건 통일이 되어야 해! 빨리 할수록 유효하다고. 통일을 하면 싸우지 않고 평화통일을 해야 해! 이북에는 자원이 없는 게 없어. 이남에는 현재 수자원이라는게 2-30키로 나머지는 원자력이다. 화력이다. 하지만 이북은 자연을 이용해서 수자원만 5천 키로가 넘어. 이북에서 자신이 할 역량이 안되니까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가져간다고. 손해를 알고서라도 통일을 해야 해. 통일이 되면 동양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한국이 될거야. 첫째도 통일, 둘째도 통일이야. 통일이 되기 전까지 독립운동을 해야 해! 그래서 학생들은 이북을 나쁘게 보지 말고, 이들을 흡수해야한다고 생각해야해.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