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열강의 식민지가 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무장 투쟁의 한계를 체감하고, 새로운 방법의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프랑스 식민통치 하의 베트남에서도 껀브엉운동[勤王運動(근왕운동)]의 실패 이후 무장투쟁이 다소 주춤하게 되었고, 새로운 학문을 흡수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 내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화를 이뤄야 한다는 공감대가 마련되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사실은 베트남의 지식인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그들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일본을 모델로 근대적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판쩌우찐은 근대적인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해 사회 개혁과 국민 계몽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동경의숙은 판쩌우찐의 주도로 1907년 3월 하노이에 문을 열었다. 판쩌우찐은 일본에서 직접 근대화의 성과를 직접 체험하고 돌아온 후 후쿠자와 유키치의 교육사상과 유신 인재를 양성하였던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을 본떠 근대 교육기관을 세우고자 하였다.
동경의숙은 성별, 나이, 신분, 능력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입학의 기회가 주어졌다. 학비를 받지 않고 교과서와 학용품도 무료로 제공하였으며, 학교의 재정은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 학교의 조직은 교육, 재정, 선전, 출판의 4부로 나뉘어 있었고, 학생들을 중학과 소학으로 구분하여 8개 반으로 편성하였다. 수업의 내용은 세계사, 지리, 수학, 자연과학, 체조 등 근대적인 과목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로마자로 표기된 베트남어인 쯔꾸옥응으[國語]로 진행하였다. 동경의숙은 수업을 통한 교육 외에도 사회 개혁과 국민 계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 등고총보(登鼓總報)를 발행하고, 각지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신서를 번역 출판하여 신사상의 전파에도 앞장섰다.
동경의숙의 이러한 활동은 베트남 국민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고,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나아가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 식민당국은 의숙의 폐쇄를 명령하였다. 동경의숙은 교육 활동은 9개월 만에 막을 내렸지만, 베트남 사회와 국민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각지에서 동경의숙을 본뜬 교육 기관들이 세워졌고, 식민 당국이 베트남 국민의 우민화를 바란다는 것을 확인 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제작 202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