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LA 방사겸 아들 데이비드 방
방사겸은 대한제국 관료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 겸 정치인이다. 그는 1905년 1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대동교육회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 대동보국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1923년 미국 시카고에서 한국독립연구회를 창립하여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신한민보와 북미시보에 사설을 게재를 하여 재미 한인 동포들에게 민족의식 고취를 하는 데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방사겸의 공훈을 기려 2011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
<녹취록>
00:31방사겸 선생께서는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저의 아버지는 강경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으셨고, 그 분은 1900-1945년 동안 한국을 지배한 일본 정권에서부터 한국의 독립을 위한 조직을 만든 분이셨습니다.
그 조직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저의 아버지와 강경은 인삼뿌리를 파는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인삼 뿌리를 쿠바와 자메이카에 있는 중국 사람들에게 파았고, 강경은 호주에 있는 중국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운영자금을 위해서 약속어음과 공칭이라는 채권 또한 팔았죠. 그것들은 $5-$15이었고, 그 당시로써는 굉장히 큰돈이었죠.
01:38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저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교육과 삶의 스타일의 장점을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본인의 학업성적과 특별활동의 성적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10명 모두가 아버지의 미술적 감각을 물려받았다고 자부합니다. 그 중 3명은 미술가가 되었지요.
저의 제일 큰형 대니는 글씨를 매우 잘 썼습니다. 반면 샘과 저는 그래픽디자이너를 했고요.
아버지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커리어였지만요. 저는 가끔 제가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1950년에 엘에이를 가기 전까지 세인트루이스에서 살았던 저희 가족들의 가족생활을 기억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70대셨과 그때에도 자식들을 부양하시려고 부동산을 하셨었습니다. 그러시면서 엘에이의 남쪽에 레스토랑을 하셨었죠. 그 두 일은 아버지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모두 다 매우 어려운 일이었죠.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위암을 판정받으셨고, 1950대 당시에 위암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계단도 오르내리기 힘드셨던 아버지는 거실을 방으로 삼아서 생활하시기 시작하셨고, 아버지는 암으로 인해서 크게 고통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에 아버지는 본인의 삶을 글로 기록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어나셔서 식탁에 앉으셔서 작은 노트북에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셨습니다.
03:59 아들로서 방사겸 선생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저의 아버지의 독립운동이 높이 평가되어 한국에서 큰 상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아버지로 둔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저의 삶의 기초이신 아버지께 물려받은 모든 것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