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을 이어온 우리 국민의 ‘고통 분담 DNA’

작성일
2020.04.09 13:45
작성자
hangil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48화 - ‘같지만 다른’ 경제적 구국운동

지금부터 103년 전인 1907년 2월21일 대구민의소는 군민대회를 열고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낭독해 운동의 서막을 알렸다.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맞서 국민들 스스로 나라 곳간을 지키기 위해 일으킨 이 운동은 대구를 넘어 전국 70여 지역과 미국·러시아·일본 해외 동포들도 참여할 정도로 반향이 컸다. 그동안 대구광역시는 직할시 승격 100일째 되는 날을 ‘시민의 날’로 기념해 왔지만 “지역 역사의 상징성을 담아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올해부터 이 운동이 시작된 날로 새롭게 바꿨다. 예정대로라면 지난 2월21일부터 일주일간 대대적인 축하 행사가 벌어질 터였다. 하지만 난데없는 ‘코로나19’ 사태로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지역 사회가 마비 상태에 놓여 안타까움과 함께 걱정이 더해진다.

 

탈지환, 조국의 금, 황금 주간…20세기에 펼쳐진 ‘같지만 다른’ 경제 구국 운동

국채보상운동은 대구 광문사에서 김광제·서상돈 등이 “일제에 빚진 국채 1300만원을 2000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갚을 것”을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선 라이즈’ ‘히로’ 등 일제 양담배가 대량 수입되어 시장을 잠식하자 이에 맞서 금연 운동부터 펼쳤던 것이다. 남자들은 “담뱃값 20전을 석 달간 모으자”는 금연동맹운동, 부녀자들은 금가락지를 바치는 탈지환(脫指環), 반찬값 줄이기 운동에 나섰다.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기관들도 캠페인을 적극 펼쳐 애국적인 자강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힘을 보탰다.

하지만 일제가 관련 단체를 강제 해산시키고 언론을 통제하면서 이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의연금 횡령 사건을 날조하는 등 일제의 방해 공작도 아쉬운 결말을 맞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해방 이후 이 운동은 “국권 상실 위기에 범국민적으로 펼쳐진 경제적 구국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기억과 경험은 90년 뒤 외환위기 속에서 ‘금모으기 운동’으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기념비와 가운데 위는 김광제, 아래는 서상돈, 오른쪽은 당시 발급한 영수증
국채보상운동 기념비와 가운데 위는 김광제, 아래는 서상돈, 오른쪽은 당시 발급한 영수증

국채보상운동은 1871년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해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게 된 일과 비교되기도 한다. 신문 기사나 인터넷 자료를 들춰보면 “당시 프랑스 국민들이 스스로 모금에 나서 현금과 금, 은을 앞다퉈 내놓았고 여성들은 금목걸이와 반지까지 기증했다”고 나와 있다. 불과 석 달 만에 50억 프랑을 모두 갚아버렸다는 글도 보인다. 어떤 기사는 “국채보상운동이 일본의 방해로 중단된 데 반해 프랑스의 배상금 모금은 대성공이었다”는 분석을 곁들이기도 했다. 언뜻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사실 여부는 의심스런 부분이 많다.

두 나라 사례는 외채 상환이란 점에서 닮은꼴이긴 하나 결이 전혀 달랐다. 프랑스 경우에는 정부가 배상금을 갚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자 유대계 금융자본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발 벗고 나섰다. 프랑스 정부의 상환 능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유럽 자본을 끌어들여 국채를 대량 매입했던 것이다. 우리처럼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라 빚 갚기 운동을 벌인 게 아니라는 얘기다. 석 달이란 상환 기간이나 시민들이 앞다퉈 금붙이를 내놓았다는 내용 역시 반론이 만만치 않은 대목으로 지적된다.

공교롭게도 대구와 함께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이탈리아에서도 금모으기 운동이 펼쳐졌다. 1935년 무솔리니 정권은 40년 전 ‘아두와 전투’의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에티오피아 침공에 나섰다. 아두와 전투는 오늘날까지 “서구 제국이 아프리카 나라에 가장 처참하게 패한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국제연맹이 이탈리아를 침략자로 규탄하고 경제 제제를 가하자 외려 국민들의 애국심이 들끓게 되었다. 제제 자체는 나라 경제에 심각한 피해를 줄 정도가 아니었지만, 무솔리니는 이를 명분으로 ‘조국의 금’ 운동 카드를 꺼내 들었던 것이다.

무솔리니 정권이 ‘조국의 금’ 운동 참여자에게 나눠준 철제 반지와 기부 증명서. 가운데는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
무솔리니 정권이 ‘조국의 금’ 운동 참여자에게 나눠준 철제 반지와 기부 증명서. 가운데는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

이 운동은 금목걸이나 금반지 등을 기부하면 ‘조국의 금’이란 글귀가 새겨진 철로 만든 반지와 증명서를 나눠주는 식이었다. 맨 먼저 무솔리니의 부인 라첼레가 결혼반지를 내놓았다. 저명한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리는 자신의 노벨상을 기부했고, 바도FC 축구팀도 은으로 만든 8.8kg짜리 이탈리아컵 우승 트로피를 헌납했다. 해외동포들도 이 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1936년 3월 미국의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은 에티오피아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결혼반지를 내놓고 철제 반지로 ‘재결혼’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그 무렵 미국에서만 10만여 명의 이탈리아인 여성들이 반지를 기부한 기록이 남아있다.

국민들의 광적인 참여 열기 속에서 가톨릭 신부들의 어정쩡한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파시스트 정부는 철제 반지를 ‘축복’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바티칸이 침략 전쟁을 찬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교황은 무솔리니의 보복이 두려워 “조심하라”는 말만 되뇔 뿐이었다. 얼마 못가 서슬 퍼런 권력에 굴복한 많은 신부들이 가슴에 품고 있던 십자가 금목걸이를 내놓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어느 추기경은 무려 2만5000개의 철반지를 축복했으며, 무솔리니를 지지하는 한 신부는 성당 꼭대기에 매달린 종을 녹여 바치기도 했다. 마치 태평양전쟁 때 일제가 벌인 ‘금속 공출(供出) 소동’과 꼭 닮은 풍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조국의 금’ 운동으로 55톤에 달하는 약 1000만 개의 반지와 금 37톤, 은 115톤 등이 모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배하자 “인생의 가장 소중한 물건인 결혼반지를 파시스트 독재자에게 갖다 바쳤다”는 현실이 직시된 수많은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침략을 정당화한 파시즘과 맹목적 애국심 사이에서 농락당한 민중들이 뒤늦게 이를 자각하게 된 셈이었다.

이탈리아의 금 모으기 운동은 10년 뒤 베트남에서 재연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 프랑스가 베트남의 종주권을 내세우며 또 다시 침략했다. 다급해진 호치민 정부는 ‘황금 주간(黃金 週間)’을 정해 금붙이, 쌀, 현금 기부를 호소했다. 수도 하노이에서만 현재 가치로 약 800억원, 전국적으로는 3700억원 상당의 금이 모였다. 이 자금이 프랑스군을 굴복시키고 독립을 이뤄낸 원동력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베트남과 이탈리아 사례는 비록 운동의 배경과 목적하는 바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지만 “경제적 구국 운동은 국민들의 애국심에 지도자의 정책적 리더십이 합쳐져야 비로소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으로 모은 금괴와 ‘그리스는 한국 사례를 배워야 한다’는 내용의 대만 ‘연합보’ 기사(2011년 11월)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으로 모은 금괴와 ‘그리스는 한국 사례를 배워야 한다’는 내용의 대만 ‘연합보’ 기사(2011년 11월)

반면 국채보상운동은 영토 강점에 앞서 경제적 예속을 노린 일제의 흉계를 꿰뚫어 보고 나라 빚 갚기 전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럼에도 민초들의 애국심에 의존하다 보니 지배층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한계에 부딪혔다. 이런 내부적 모순 보다 일제의 탄압이 운동의 실패 요인으로 더욱 강조되는 현실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IMF 사태로 인한 금모으기 운동도 경제 위기 극복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보다 애국심과 단결력에 초점이 맞춰졌다. 무턱대고 자긍심만 내세울 게 아니라 “위기로 내몰린 원인을 곱씹어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지적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103년 전 일제 경제 침탈을 교훈 삼아 ‘노 재팬’ 열기에 ‘경제 정책’ 뒷받침되어야

경제적 구국 운동은 일본의 부품 수출 규제에 맞선 ‘노 재팬’ 열기로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너무 생각없이 일본 제품을 써왔다”고 자각하는 국민 의식은 굳건한 상황이다. 하지만 여당이든 야당이든 이 나라 정치권은 불매운동의 후속 조치와 경제적 불균형 바로잡기엔 뒷전이다. 아무리 국민들의 자각과 의식이 확고해도 정책적 결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낱 분풀이에 그치기 십상이다. 100여 년을 이어온 우리 국민의 ‘고통 분담 DNA’가 또 다시 허망한 애국심으로 쪼그라져서는 안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