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회관(이전한 새 건물)
서상일을 비롯한 대구지역 민족운동가들에 의해 1922년 대구부 신정에 2층 건물로, 청년들을 교육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세워졌다. 1920년대 대구지역의 많은 사회·문화운동 단체들이 이곳 조양회관에 둥지를 틀었다. 대구구락부·대구운동협회·농촌사·대구청년회·대구여자청년회·동아일보 대구지국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1927년 9월에는 신간회 대구지회, 1928년 2월에는 근우회 대구지회가 이곳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후 조양회관은 1941년 일제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대구지역 사회운동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위 건물은 대구 효목동 망우당공원 내에 복원되어 있는 새 건물로, 독립운동 전시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 경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
대구 동구 망우당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1945년 광복을 의미하는 45m로 조성됐다. 광복회원과 대구경북 시민의 모금으로 2006년 준공했다. 1895년부터 1945년 광복될 때까지 50년간 대구·경북 항일독립유공 국가 서훈자 1천796위자를 명각해 봉안하고 있고, 국가수호의 상징으로서 세계인 앞에 자주독립정신을 표방하겠다는 건립취지가 새겨져 있다.
신암선열공원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공원으로 국내 유일의 애국지사묘지공원이다. 본래 애국지사의 묘소는 대명동 시립공원에 있었으나 1955년 대구대학교가 들어서자 동구 신암5동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묘지성역화 사업에 의하여 1987년 3월 1일 선열공원(先烈公園)으로 조성되었다. 단충각 등의 시설이 있으며 대구 지역 출신 애국지사의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대구사범학교
일제강점기 식민지 교육정책 실행에 필요한 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로, 1940년을 전후하여 재학생들이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대구사범대학교 학생들은 1938년 조선어 과목이 폐지되자 우리말 보존을 위해 노력하였고 일본이 경부선복선철도공사에 학생들을 강제동원한 데 대하여 항거한 왜관사건을 계기로 문예부, 연구회, 다혁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앞장 섰고, 1941년에는 문예부의 비밀지 "반딧불"이 발각되어 가담자 35명이 실형을 선고 받고 5명은 순국하였고 이 분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추모비가 1973년 건립되었다.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
1942년 2월 대구사범학교재학생 35명 항일결사 모임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데 대한 공훈을 기리고 옥중 순국한 강두안, 박제민, 박찬웅, 서민구, 장세화 등 5인에 대한 추모를 위하여 연건립됐다.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탑
일제강정기 말기(1942년)의 유일한 학생독립운동이었던 '태극단학생독립운동'은 대구상업학도들이 조직한 '태극단'에 의해서 일어났으며, 뚜렷한 결사동기와 원대한 행동강령으로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탑은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친 태극단의 의지를 기리고자 기념공원 내에 세워졌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대한제국 말기에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의 하나로 대구에서 비롯된 국채보상운동의 구국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이 곳에는 22.5t의 달구벌대종을 비롯하여, 향토서예가들이 쓴 이육사·박목월·조지훈·이호우·윤동주의 시비와 대형 영상시설, 이언적·김굉필·서거정·이황·정몽주·서상일·서상돈·이상화의 명언비가 있는 오솔길 등이 위치해 있다.
석주 이상룡선생 구국기념비
경북 출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로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여 건립되었다. 이상룡 선생은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조직하고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으며, 간도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 등을 열기도 했다. 임시정부 국무령 사임 이후, 서간도 지역에서 3부 통합운동을 펼치다 병사 순국하였다.
왕산 허위선생 순국기념비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전국의 의병을 규합한 13도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서울 진공작전을 감행한 왕산 허위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10월 건립된 비석으로, 대구 달성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다.
장윤덕의사 순국기념비
이강년 대장 휘하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35살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신 장윤덕 선생의 구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된 비석으로, 경북대학교 내 위치하고 있다.
목산 조현욱선생 순국기념비
청송 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동한 목산 조현욱 선생의 공적을 추모하고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석으로, 대구 북구 노고동에 위치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안 선생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격문을 보내 참여를 이끌었으며, 이를 계기로 옥고를 치른 이후 일제에 병탄된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 비분하여 투신 순국하였다.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파리장서 운동은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유림들이 같은 해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피해실정을 밝힌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작성, 이를 여러 언어로 번역하여 세계만국평화회의(프랑스 파리에서 개최)에 김규식을 통해 제출한 사건이다. 파리장서는 국내외 신문에 크게 보도돼 전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천명하였다. 한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97년 건립되었다.
우강송종익선생상(흥사단)
대구 출생으로, 미국에서 항일민족단체인 공립협회 활동을 시작으로 광복 때까지 미주 지역 한인사회의 안녕과 권익보호, 독립운동 자금 조달 등 임시정부 활동 지원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우강 송종익 선생을 기리는 기념상이다.
순국선열 정학이 (동상비)
대구의 화원초등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정학이 선생은 일제강점기 구국의 이념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 던진 열사로, 1913년 대구 달성에서 출생하였다. 15세 때 일본 강압에 항거하였으며,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포의 인권보호를 위한 단체를 결성, 지하 인쇄실을 운영 및 항일 조국 운동을 위해 헌신하다 1933년 12월 17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돼 1934년 11월 8일 21세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신명 3.1운동 기념비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큰 역할을 했던 신명학교의 교사 이재인과 졸업생, 재학생들을 기리고자 설립된 비석이다. 신명의 3.1운동은 국권 회복과 여권 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애국부인회와 조선여자기독청년회의 활동을 통해 꾸준히 계승, 발전되었으며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상화 시비
대구가 낳은 애국시인 이상화를 기리는 시비다. 이상화는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날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며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울부짖었고, 1927년 신간회 대구지회에 참가하여 달성공원에 'ㄱ'당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광복군 창설을 지원했던 형 이상정, 부인 권기옥 여사 등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한편 이 비석은 우리나라 문단 최초로 세워진 시비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