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두려워 했던 백산 안희제, 백범기념관은 더 많이 알려져야 합니다!
훈훈-터[온라인기자단]/출동! 훈남훈녀 2016.04.18 19:45


<백산기념관 외부>
백산기념관(이하 ‘기념관’)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안희제 선생의 흉상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생의 흉상은 기념관의 설립과 동일한 시기인 1995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에는 흉상의 얼굴이 선생의 실제 얼굴과 닮지 않다는 얘기가 종종 나왔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여 선생의 사진을 참고한 흉상이 다시 제작되었고 그 결과 현재 전시된 흉상은 선생의 얼굴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전시실은 그리 크지 않다. 유리로 된 몇 개의 디스플레이와 그 맞은 편에 소규모로 진열된 선생의 유품(생전에 사용하던 도장, 한학을 공부하던 도서와 보성전문재학당시의 교과서 등)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람하는 내내 선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싹틀 수 있었던 이유는 분야를 넘나들며 혼신의 힘을 쏟았던 그의 행적이 전시실에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었다.
1. 출생 배경과 활동 연혁
백산 안희제 선생은 1885년 8월 4일(음)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안희제선생은 지금의 경북 영주 순흥을 관향으로 하는 순흥안씨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安珦), 이등박문(이토 히루부미)을 저격한 안중근(安重根), 민족의 스승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암울하던 시절에 한민족의 정신과 기개를 세상에 알렸던 안재홍(安在鴻), 안익태(安益泰), 안무(安武), 안창남(安昌男) 등의 인물들과 뿌리가 같다.
(**출처 - 순흥안씨 양도공파종회 http://cafe.naver.com/iahn)
**활동연혁
1885년 출생
1905년 보성전문학교 입학
1907년 구명학교, 의신학교 설립
1908년 창남학교 설립
1909년 대동청년단 결성
1910년 양정의숙 졸업
1911년 러시아 망명
1914년 중국을 거쳐 귀국, 백산상회 설립
1919년 영남일대 독립선언서 배포
1919년 기미육영회 조직
1920년 동아일보 창립발기인 참여(동아일보 부산지국장 역임)
1927년 자력사 설립, 협동조합운동 전개
1929년 중외일보 사장 취임
1930년 전조선 수재 구제회 조직
1933년 국외독립운동기지로 발해농장 경영
1941년 대종교서적간행회 회장
1942년 임오교변으로 일경에 체포
1943년 9월 1일 병보석 출감, 출감 후 3시간 만에 순국
1998년 고려대 명예학사 학위 수여
(**출처 – 백산기념관)
2. 교육구국운동
선생은 1905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에 입학하나 졸업은 하지 못하고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으로 편입한다(일각에서는 당시 일제가 전문적인 교육집단의 하나였던 보성전문학교를 감시하고 억압했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 양정의숙으로 편입한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백산기념관에 의하면 선생이 수학하던 시기에 보성전문학교는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공부에 전념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주변 학우 23명과 함께 양정의숙으로 편입했던 것이다).
배우고자 했던 굳은 의지보다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학교를 다니면서 학교를 설립했던 선생의 행적이었다. 민족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후생양성(독립운동가)을 위해 교육받는 일 뿐만 아니라 교육하는 일에도 힘썼다.
1907년에 구포사립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했다. 구포사립구명학교는 안희제 선생과 그의 막역지우였던 윤상은 선생에 의해 설립되었다. (참고; 윤상은 선생은 1912년 한국 최초 민족계 지방은행인 구포은행을 설립하고 은행장을 역임했다. 구포은행 설립이 갖는 의미는 상당했다. 민족계 은행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간섭과 통제를 받지 않았다. 또한 윤상은 선생은 안희제 선생과 함께 기미육영회 조직에도 참여했다.) 안희제 선생은 같은 해 의령에 의신학교를 설립, 1908년에는 고향 설뫼(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설립했다. 이처럼 선생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는데 교육에 대한 선생의 가치관이 어떠했는지는 기미육영회를 조직했던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기미육영회는 1919년 영남지방의 유지들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중점사업은 매년 10명씩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해외(일본, 중국, 독일, 영국 등)로 유학 보냈던 것이었다. 제헌국회의원 전진한,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국문학자 이극로, 전 국방부장관 신성모, 전 부산시장 문시환 등은 기미육영회의 출신으로 이처럼 우수한 인재들이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선발 사업을 통해 배출되었다는 것은 교육을 받는 일의 중요성과 후생을 양성하는 일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3. 국내 비밀 결사 단체 활동
선생은 1909년 안중근 의사 의거를 계기로 대동청년단을 설립한다. 대동청년단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단체임과 동시에 광복 당시까지 발각되지 않았던 유일한 비밀결사항일단체였다(**활동자료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명칭도 ‘대동청년단’ 또는 ‘대동청년당’으로 쓰이기도 하나 대동청년단 단원이었던 윤병호 선생의 회고록에는 ‘대동청년단’으로 기록되어 있다 – **출처 http://blog.naver.com/teamay). 선생은 대동청년단 2대 단장을 역임하였고 조선국권회복단 단원으로도 활동했다. 대동청년단이 다른 단체들과 달랐던 이유를 단규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단규를 읽으면서 문득 선생의 강인한 정신과 독립을 향한 결의가 느껴졌던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대동청년단 단규
1) 단원은 반드시 피로 맹세할 것
2) 새 단원의 가입은 단원 2명 이상 추천을 받을 것
3) 단명이나 단에 관한 사항은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4) 경찰 기타 기관에 체포될 경우 그 사건은 본인에만 한하고 다른 단원에게 연극시키지 말 것
대동청년단은 단원 각자가 독립적 조직을 가지고 있는 피라미드형 구조로 되어있다. 단원들은 17~30세 미만의 남성으로 구성되었고 조직원은 약 80여명이다. 그나마 밝혀진 핵심인물로는 윤병호 선생과 윤현진 선생이 있는데 이들도 전 인원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조직원들이 서로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다. 오직 안희제 선생만이 80여명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대동청년단은 이 정도로 치밀했기 때문에 완벽할 수 있었다.
대동청년단의 젊은 청년들은 조직의 중심이 되었고 투쟁노선만 고정하지 않고 무장투쟁, 임시정부, 의열단, 군자금 지원과 교육, 사회주의 등 전방위적인 활동을 개별적인 단체에 소속되어 했던 사실은 대동청년단이 끝까지 비밀리에 임무수행을 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였다.
4. 백산상회의 설립과 운영
선생은 1914년 부산에서 우리나라 민족자본에 의한 최초의 주식회사인 백산상회를 설립했다(선생은 경남은행, 경성방직의 주주였던 최준(경주 최씨)과 백산상회 최대주주(2000주)가 된다). 설립초기에는 곡물, 면포,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였으나 1919년 백산무역 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하였다. 백산상회가 가지는 의미는 개인상회에서 주식회사로 사업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넘어선다.
백산상회는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자금 조달과 독립신문 보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중요 독립운동기지(또는 비밀연락기지)였다. 백산상회에서 상해 임시정부 운영자금의 60퍼센트를 담당했다고 하니 백산상회 없이는 임시정부 자체를 논할 수 없다.
다음의 일화는 선생이 어떤 신념으로 백산상회를 운영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광복 후 김구 선생은 최준에게 임시정부 자금조달 인명기록장을 보여주었다. 사실 최준은 그가 지금껏 지원했던 독립자금 중 일부는 안희제 선생의 개인 활동비로 쓰여졌을 거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이 보여준 기록장에는 자신이 안희제 선생에게 전달한 돈이 한 푼의 차이 없이 임시정부에 송금된 것이 적혀있었다. 이에 최준은 자신이 안희제 선생을 의심했다는 사실에 통곡하며 고인이 된 백산의 고향땅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5. 언론, 학회 활동
선생은 1920년에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9년에는 중외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31년 중외일보의 지령을 계승한 중앙일보의 고문이 되었다. 그 당시에 언론활동을 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외부 압력(일제 및 정치세력)에 의해 사실이 왜곡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보통수준의 주관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언론활동을 선생은 투쟁이라 여기며 활발히 전개했다.
‘매국노’ 박춘금과 관련된 일화에서 어떠한 세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선생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당시 박춘금 이라는 ‘매국노’가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국회의원(=중의원)을 2선 역임하였고 무력으로 정치를 한다는 소위 정치 깡패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상인들을 사랑하는 집단이라는 이름의 ‘상애회’를 조직했지만 그 실상은 달랐다. 일본에 체류중인 조선상인과 노동자를 학대하고 착취하기 일쑤였다(대표적인 예로 조선인을 상대로 도항증명서(배를 타고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는 증명서)를 강제 발급하게 하여 부당이익을 취득했다). 이에 분노한 선생은 박춘금을 상대로 성토대회를 열었다.
박춘금의 부당함을 사회에 여론화시킨 것이다. 성토대회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목숨을 내걸고 활동했던, 그 당시 유일하게 언론투쟁을 했던 선생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6. 국외 독립운동기지와 임오교변
선생은 1933년 농장 경영에 착수했다. 발해에 농장을 세워 조선인들을 이주시켰고 농지를 개간하고 수로를 개설하게 했다. 또한 대종교를 입교했다.
대종교는 독립운동을 위한 종교 또는 조직으로 인식될 정도로 한민족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발해에 세워진 농장은 사실 국의독립운동기지인 셈이다. 선생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발해에서도 계속되어 민족정신과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하지만 일제는 발해보통학교내에 밀정(조병현)을 잠입시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1942년 여름, 대종교 교주 윤세복이 당시 국내에 있던 조선어학회 이극로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 편지 속에 ‘널리펴는 말’이라는 원고가 동봉되었는데 일제는 검열 과정에서 이 글의 끝에 나오는 “일어나라, 움직이라!”라는 구절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날조하고 이것을 “조선독립선언서”라 하여 대종교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반국가단체의 죄목을 만들어 조선어학회사건과 때를 같이 하여 만주와 국내 각처에서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대종교지도자 21명을 동시에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종교사에서도 드문 대종교의 임오교변이다. 윤세복을 비롯한 20여명의 대종교 지도자들은 이른바 잠행징치반도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구금되어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안희제 선생은 9개월 동안 70여회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문최조를 당했다). 결국 선생은 1943년 8월 3일 고문 후유증으로 보석으로 출감한지 3시간 만에 순국하였고, 정부에서는 그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http://blog.daum.net/gukhak/14551229)
임오십현(임오교변으로 순국하신 10분의 명단) - 권상익, 이정, 안희제, 나정련, 김서종, 강철구, 오근태, 나정문, 이창언, 이재유


백산기념관 전시실 내부


안희제 선생의 흉상 안희제 선생의 사진
7. 취재를 마치며
조국독립을 위해 끊임없었던 선생의 고군분투에 대한 경의와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알려지지 않는 지금의 현실이 오버랩 되어 기념관을 나선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오래 동안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이 게시물은 hangil님에 의해 2016-04-26 16:30:36 내고장 역사VJ(경기)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