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후손

강영소 손자 강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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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독립신문사 하와이 지국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언론인.]

 하와이로 이주한 후 그는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도 1905년 윤병구(尹炳九)·정원명(鄭元明) 등과 에와농장(Ewa農場)에서 ‘친목회’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친목회는 처음에 어려운 한인동포들의 환난상휼(患難相恤)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국권회복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1907년 5월 『친목회보(親睦會報)』를 간행하였다.

 또한 1906년에는 윤병구·이태수·강영소 등과 호놀룰루에서 공진회(共進會)라는 국권회복운동 단체를 결성하였고, 1910년 국민회(國民會)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결성하였을 때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총무를 맡아 활동하다가, 미본토로 이주하여 1911~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서기, 1912~1914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대의원·학무원 등을 각각 역임하였다.

1912년 3월에는 신한민보사 사무원으로 있었고,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과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1914~1915년 북미지방총회 총무를 맡았으며, 1916년과 1920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독립운동의 연락과 일치된 행동방침을 마련하기 위해 강영소와 황사용(黃思溶)을 하와이에 특파하였다. 이들은 1919년 6월 4일 하와이에 도착하여, 하와이지방총회와 대조선독립단의 합동에 노력하여 그 해 7월 18일 합동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그 후 강영소는 1922년 신한민보사 편집장과 독립신문사 하와이 지국장을 맡았고, 1930년 2월 시카고 대한인공동회 재무, 1930년 11월에는 신한민보사 시카고 지국장을 지냈다. 이후 강영소는 시카고지방으로 이거하여 그 곳에서 15년 동안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4년 8월 별세하였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20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