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후손

동농 김가진 손자 김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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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1846년(헌종 12) ~ 1922년) 
 
김가진은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실의에 빠져 두문불출하다 3·1운동을 만났고, 그 뒤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 탓에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낀 동농은 1919년 10월, 3남 의한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곧이어 동농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실패한 ‘대동단 사건’을 일으킨다. 당시 일제는 임시정부를 두고 “사회 하층민들이 만든 대수롭지 않은 모임”이라고 선전했으나, 동농의 망명과 이강의 망명 미수는 당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대사건이었다.

동농은 임시정부의 고문과 백야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다가 1922년 이국땅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동농 가문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부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한 3남 의한(1900~1964·독립장 서훈)은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재정난에 빠진 임정의 안살림을 챙겼고, 부인 정정화(1900~1991·애족장 서훈)는 여성의 몸으로 군자금 마련을 위해 여섯 번이나 국내에 잠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또 동농의 4남 용한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 김상옥 열사 사건에 연루돼 모진 고문 끝에 후유증으로 숨졌고, 부친을 잃은 석동(1923~1983·애국장 서훈)은 큰아버지 김의한이 있는 중국으로 건너가 최연소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1928년 상하이에서 김의한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자동 회장은 임시정부를 따라다니며 성장기를 보냈다. 해방 이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잠시 <조선일보> 기자로 있다가 사표를 던지고 야인으로 지냈다. 그는 4·19 혁명 직후 창간된 진보적 일간지 <민족일보>의 기자로도 일했으나, 5·16 쿠데타로 민족일보가 폐간되자 언론계를 떠났다. 현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농은 후손으로 3명의 독립운동가를 남겼지만, 정작 본인은 일제가 다른 76명의 고관대작들과 함께 준 남작 작위를 거절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3번이나 탈락됐다. 동농의 유해는 상하이 송경령능원에 묻혔지만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기에 파괴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2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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