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후손

이진룡 외손자 우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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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룡 장군(1879 ~ 1918. 5. 1) 건국훈장 독립장

황해도 평산(平山) 출신이다.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의 문인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용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는 등 일제의 내정간섭은 점차로 심화되고 국권이 날로 유린되어 갔다. 이때 이진룡은 국권회복의 대의를 품고 박정빈(朴正彬)·조맹선(趙孟善)·신준빈(申俊彬)·신정희(申貞熙)·한정만(韓貞萬) 등과 함께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평산에서 거의하여 박기섭(朴箕燮)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선봉장이 되었다. 그는 의진의 선두에 서서 5개 부대의 병사를 지휘하여 평산, 경의선 계정(鷄井), 예성강 연안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말에는 하상태(河相泰)·한정만과 함께 강화도에서 온 지홍기(池洪基)의 의진과 연합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때 적병이 그의 뒤를 추격하므로 가족을 서울로 보내어 옥산 이정규(玉山 李正奎)에게 맡겼다. 옥산은 그해 말에 이진룡의 자당이 돌아갔으나 소문이 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 마침 이진룡이 찾아왔으므로 몰래 염습하여 남산에 암장하고 이듬해 3월이 되어 고향으로 운상(運喪)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09년 5월 연기우(延基羽)·김수민(金秀敏)·하상태(河相兌)·한정만·이인순(李仁淳)·정용대(鄭用大)와 더불어 동으로 철원·평강에서, 서쪽으로는 평산·백천 등 3도를 왕래하면서 활동하였다. 적들은 이들의 활약으로 매우 곤란이 심하였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이들을 소탕할 것을 엄밀히 의논하였다. 그러한 중에도 군자금을 모금하여 전투에 사용할 각종의 무기를 매입, 병력을 증강시켰다. 1910년에는 경의선의 계정과 잠성(岑城) 사이의 철로를 파괴하고, 평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이 전투에서 10명의 부하가 체포되었다. 그 이후 개성과 해주, 서흥(瑞興) 등지에서 5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일군 보병 7중대 및 기병과 접전하였다. 이때 100여 명의 부하가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의진을 3개 부대로 나누어서 활약하였는데 부장으로서 김정안(金貞安)·최순거(崔順巨)·한정만(韓貞萬)이 있었다. 1911년에는 황해도 해주·평산·곡산 일대에서 5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적 보병 제3여단장 중촌(中村) 소장이 지휘하는 보병 16중대와 기병 2중대 및 헌병과 접전하여 250명의 부하가 체포당하였다. 그 이후 국내에서는 의병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1911년 10월 지휘권을 한정만에게 위임하고 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奉天省 柳河縣 三源堡)에 이르러 조맹선(趙孟善)·이종협(李鍾協) 등과 재기를 꾀하여 활동하다가 뒤에 박장호(朴長浩)·윤세복(尹世復)·조맹선·홍범도(洪範圖) 등과 같이 장백(長白) 무송현(撫松縣) 등지에 근거를 두고 포수단을 조직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만주 각지에 산재한 한국 이주민들을 규합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동시에 애국청년 소집과 군자금 모금운동에 주력하였다. 1916년 가을에 조맹선·황봉운(黃鳳雲)·황봉신(黃鳳信)·김원섭(金元燮)·김 일(金鎰)·김효선(金孝善)·한치현(韓致賢) 등 7명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평북 운산금광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음력 9월 9일 이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압록강을 건너 영변군 팔원면 용성동(龍城洞)의 밀림 가운데 잠복 대기하고 있었다. 이때 평양으로부터 운산 북진(北鎭)으로 들어오는 송금마차가 왔다. 이들은 상례대로 송금마차가 2번에 서고 경비차가 그 전후에 따르는 것으로 알고 2번 마차를 기습공격하였는데 불행하게도 현금마차가 아니었다. 이러한 일을 예상하고 예정을 바꾸었던 것이다.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추격하는 일군의 눈을 피하여 전원 무사히 만주기지로 귀대할 수 있었다. 1918년 1월 조맹선·황봉신(黃鳳信)·차도선(車道善)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社)라는 비밀 결사 단체를 조직하였다. 황봉신은 본래 이진룡의 부하로서 국내로 잠입하여 평북 이산(梨山)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친일파 주구인 헌병 보조원을 살해하고 만주로 건너온 인물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고자 만주로 망명해 오는 애국청년들을 규합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며 계몽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군사훈련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만주에 분산하고 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하고 대규모적인 기구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국내침공을 감행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계획이 무르익어 갈 때 일본의 주구 임곡(林谷)의 밀고로 관전현(寬甸縣)에서 체포되어 갖은 악형을 당하고 여순(旅順)으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에 황봉운·황봉신 형제가 탈환하려다가 같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평양지방법원에서 함께 사형언도를 받고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우(禹)씨도 따라서 순절하였다.
 
제공 : 항일영상역사재단(201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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